교통사고로 모든 것을 잃을 뻔한 한 신앙인이, 절망의 밑바닥에서 다시 하느님께 돌아와 가족·일·사명을 회복해 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 그리고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
![]() [코리안투데이] 머릿돌2. 신앙으로 이룩한 인간 승리 – “제 삶은 제 것이 아닙니다” © 지승주 기자 |
저는 1953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생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고,
6학년이 되던 해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다니며, 시골소년이던 저는 서울의 학생으로,
조금씩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청년으로 자라갔습니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아버지께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선종하셨습니다.
집안 장남으로서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때의 저는 오히려 그것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동력으로 바꾸었습니다.
“더 잘해야 한다,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슬픔 위에 다짐을 덮어 씌우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전공 공부는 물론 외국어, 각종 과외 활동, 동아리와 친구들과의 교류까지,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어디서든 앞서가고 싶었고,
노력한 만큼 반드시 결과가 따라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R.O.T.C. 통역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뒤, 대기업 무역부에 입사했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으며 “전도유망한 사원”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금방 더 큰 무대를 꿈꾸며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겼고,
예상대로 몇 달 만에 경영진의 인정을 받아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교만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뛰어나서 그렇다”는 자만심이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칭찬과 성과를 받을 때마다 감사 대신 우쭐함이 앞섰고,
제 안에서 하느님께 드릴 자리는 점점 좁아져 갔습니다.
1980년 12월, 스물여덟 살이던 저는 아내를 만나 혼인성사를 올렸습니다.
이듬해에는 첫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때 저는 세상을 다 얻은 듯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게 믿었고, 세상이 마치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족과 친척, 친구들의 축복과 기대 속에서 저는,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 당연히 받는 것이다”라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명석하다는 평가, 강한 의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더 높은 자리도 곧 손에 잡힐 것 같았습니다.
그 사이 제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는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1982년 3월 25일.
전날은 회사 동료들을 집으로 초대해 첫 아들의 백일잔치를 한 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된 기쁨과 자부심으로 집안이 가득하던 바로 그 다음 날,
회사의 주요 일본인 바이어가 계열사를 방문했습니다.
본사에 있던 저는 일본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그를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강남의 한 룸살롱에서 늦은 밤까지 이어진 접대가 끝난 뒤, 저는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뒷자석에 몸을 기대자마자 깊은 피로에 눈을 감았고,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갑작스러운 엄청난 충격,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덮친 순간,
저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강북 쪽에서 내려오던 자가용 한 대가 음주운전으로 잠수교 중간에서 미끄러지며
제가 타고 있던 택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고 합니다.
사고 현장에 출동한 교통경찰은,
경찰 생활 십여 년 동안 그렇게 처참한 현장은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순천향대 서울병원으로 실려 간 저는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의사는 가족들에게 “살 가망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온몸에는 깁스가 둘러쳐져 있었고, 산소마스크에 의지한 채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저를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막내 여동생이 쓴 병상 일지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시간이 얼마나 절망적인 순간이었는지 짐작할 뿐입니다.
사고 후 23일째 되던 날,
제 얼굴에 처음으로 작은 변화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고, 눈가에는 눈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제 우리의 기도가 닿기 시작했다”고 믿으며 하느님께 더욱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이 아이의 목숨만은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이제부터는 당신 뜻 안에서 살겠습니다.”
34일째 되던 날, 저는 한쪽 눈을 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도 조금씩 움직였고, 서툴지만 글씨도 써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50일째 되던 날, 제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아멘”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커다란 불행 앞에서 묻습니다.
“왜 하필 나인가. 왜 우리 가정인가.”
아버지를 잃고도 꿋꿋이 살아온 어머니,
아들을 얻고 새 인생을 시작했다 믿었던 아내에게
이 사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아침에 멀쩡히 출근한 남편을,
한밤중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 중환자실에서 마주하게 된 아내는
이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건 신문 구석에나 나오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지.”
아내는 괴로움 속에서 수없이 묻고 또 물었습니다.
“아, 이게 바로 청상과부가 된다는 거구나…”
어머니는 탄식하셨습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어 이런 벌을 받는지 모르겠다…”
우리 가족이 안고 있던 가장 큰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고가 난 그해 9월 12일, 저는 처음으로 성당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서울 가회동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하던 그날,
저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습니다.
다시 주님의 집에 돌아온 저는,
복음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났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온 아들,
그리고 그런 아들을 두 팔 벌려 맞이하는 아버지.
영세한 지 스무 해가 넘도록
저는 신자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혼인성사를 통해 가정을 이루었고, 귀한 아들을 선물로 받았으면서도
그 모든 은혜를 잊은 채 살았습니다.
1981년 한 해 동안 저는 미사에 한 번도 참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일에 취해 성당 문턱조차 밟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랬던 저를 하느님께서는 교통사고라는 큰 시련을 통해 다시 품 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저주 같았던 그 사고가,
돌아보면 저와 우리 가정을 살리는 부르심이었습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는 제 이웃을 통해,
특히 제 아내와 아이들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두 살 반밖에 되지 않았던 큰아들은
제가 움직일 때마다 작은 도우미가 되었습니다.
제가 방에서 일어나면 얼른 지팡이를 가져다주었고,
현관으로 향하면 먼저 나가 신발을 꺼내 놓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운동을 하고 방에 앉아 있었는데
아들이 제 발을 보더니 “아빠, 지지(더럽다)”라고 말하며 저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변기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라고 말하더니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작은 손으로 제 발에 비누를 칠해 깨끗이 씻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마치 주님께서 제 발을 직접 씻어 주시는 듯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님, 저 같은 죄인의 발을 씻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이 겸손을 제 안에도 허락해 주십시오.”
아들은 또 제가 기도해야 할 시간에 친구가 놀러 오면,
친구들을 조용히 다른 방으로 데려가 “아빠, 기도”라고 말하며
제 기도 시간을 지켜 주었습니다.
외출 전후 십자고상 앞에 인사를 잊으면,
아들이 먼저 십자고상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어린 아들의 행동에서 하느님의 세심한 사랑과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은 조금씩 회복되었고, 둘째 아들 지후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내는 세를 놓던 문구점을 인수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가게를 지키며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어머니와 아내는 동생들을 챙기고, 집안일을 하고, 둘째 아이를 돌보고,
빨래와 살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그런데 저는, 온종일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는 물론 귀한 일이지만,
저의 몫을 온전히 아내에게 맡기고 기도만 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가족과 하나 되는 것,
가정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그때부터 저는 작은 일이라도 돕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불과 요를 개어 옷장에 넣고, 방을 쓸고, 집안을 정리했습니다.
남들이 보면 사소한 일 같지만,
저에게는 “가정을 위해 일한다”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한편,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거의 도맡아 하셨습니다.
진통을 참고 집을 지키며, 틈틈이 가게까지 봐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아내는 문구점을 맡아 꾸려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신경통이 심해져
더 이상 가게 일을 도와주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 가게는 누가 보나?”
가족 모두가 고민에 빠졌을 때,
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내가 해 볼까?”
아내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한 제가 높은 진열대 물건을 꺼내 주는 것도 힘들어 보였고,
빠른 말투 탓에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잘될지에도 의문이었습니다.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도 불안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아내는 결국 허락했고, 문구점은 우리 부부에게 맡겨졌습니다.
문구점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물건을 찾고, 값을 계산하는 일은
저에게 기억과 판단력을 회복시키는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방 안에서 가만히 있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훈련이었습니다.
2년쯤 지나자, 아내는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남편에게 기대던 자신이,
이제는 남편을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제게 두 번째 삶을 허락하시고,
조금씩 제 자리를 되찾게 해 주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문구점만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더 큰 수입이 필요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찾아야 했습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래도 제일 자신 있었던 건 수학이었지.”
그래서 다시 중·고교 수학 참고서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어떨까” 생각을 아내와 나누었습니다.
마침 꾸리아 단장을 지낸 형제님이 병문안을 왔다가
“그럼 우리 아이를 한 번 가르쳐 보시겠습니까? 믿고 맡겨 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첫 제자가 생겼습니다.
옛 기억을 되살려 정성껏 가르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성적은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
입소문이 퍼졌고, 고등학교 2학년 학생, 그룹 과외, 개인 과외 등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말이 또렷하지 않은 저에게 자녀를 맡겨 주신 부모님들,
그리고 그런 길을 열어 주신 하느님께
저는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한편, 아내는 남대문 새벽시장 옷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더 단단해져야 했습니다.
결혼할 때만 해도 수줍은 새색시였지만,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된 남편과 시어머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 어두운 거리를 걸어 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며느리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집안일을 기꺼이 떠맡으셨습니다.
환경은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내는 후자를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아내는 액세서리 점포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점점 그 일에 익숙해지며 작은 자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점포 주인의 권유로,
어머니 칠순 잔치 때 들어온 축의금을 보태고,
은행 융자와 처제에게 빌린 돈을 합쳐
마침내 점포를 우리 소유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교통사고 이후 40여 년.
주님께서 허락하신 길을 돌아보면,
그저 “감사합니다”라는 말뿐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저를 건져 주셨고,
영과 육을 고쳐 주셨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셨습니다.
지금 아내는 융자를 모두 상환하고,
더 넓은 아파트에서 승용차로 출퇴근하며 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 발을 씻겨 주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던 큰아들은
대학 졸업 후 결혼해, 이제 저를 “할아버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둘째아들 지후는 군 복무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늦은 밤이면 우리 가족은 둘러앉아
아내가 가져온 머리핀과 머리띠를 함께 포장하며
서로의 하루를 나눕니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은총이 깃든 시간입니다.
지금도 저는 미사와 성체,
공동체 형제들과의 사귐을 통해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 갑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신앙 간증을 나눌 때,
가족과 부딪히는 순간마다
주님께 받은 은총을 떠올리며 길을 찾습니다.
무엇보다 제 곁에서 이렇게 말해 주는 아내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죽었다가, 주님께서 다시 살려 주신 사람이에요.
그러니 당신의 삶은 이제 주님의 것이에요.
가게는 내가 돌볼 테니,
당신은 주님의 일에 더 마음을 쓰세요.”
그래서 저는 고백합니다.
제 삶은 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다시 주신 삶이기에,
이제 이 삶은 온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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