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조선 편] 제16화: 고조선의 후예들 – 부여와 고구려의 탄생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던 그날. 고조선의 역사는 끝났지만, 고조선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2,225년 동안 동아시아 북방을 지배했던 고조선이 한나라 군대에 무너졌다. 그러나 역사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수십만 고조선 유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북으로 간 이들은 부여를, 남으로 간 이들은 삼한을, 그리고 동쪽에서 다시 일어선 이들은 고구려를 건국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이 고조선 유민의 후손이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와 신라로 이어진 역사의 DNA는 고조선에서 시작되었다. 망국의 유민이 어떻게 동아시아 최강국 고구려를 탄생시켰는가? 그 놀라운 재건의 역사가 지금 시작된다.
◆ 흩어진 백성들, 네 갈래 길
기원전 108년 가을, 왕검성 성문이 열렸다. 1년간의 항전 끝에 대신 성기가 살해되고 고조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나라는 즉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의 한사군을 설치하며 영토를 장악했다. 그러나 수십만 고조선인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6촌의 주민들은 본래 조선의 유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유민들은 북방으로, 동방으로, 남방으로, 서방으로 대이동을 시작했다. 2천 년 이상 축적된 청동기·철기 기술, 농경 문화, 행정 체계를 품고 새로운 땅으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서 역사의 새 장이 열렸다.
“신라 6촌의 주민들은 본래 조선의 유민이다(新羅六村之民 本朝鮮遺民也)”
– 출처: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제1 혁거세거서간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한 무제가 흉노 정벌과 서역 개척으로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 실크로드가 개통되어 동서 무역 활발
🗿 로마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 완료(BC 58-50).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앞두고 공화정 말기의 혼란
🏺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 클레오파트라 7세가 등장하기 직전, 로마의 영향력 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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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고조선 멸망 후 유민 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 – 왕검성에서 북방(부여), 동방(옥저·동예), 남방(삼한), 서방(선비·오환)으로 퍼져나가는 화살표와 주요 정착지 표시]
📜 그날의 현장
“기원전 37년, 압록강 중류 졸본 땅. 한 청년이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말에서 내렸다. 그의 이름은 주몽. 부여에서 쫓겨난 망명자였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이들의 눈빛은 달랐다.”
“마을 어귀에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당신이 바로 예언된 그 사람입니까? 해모수의 아들, 유화부인의 아들이시오?’ 노인의 손이 떨렸다. 그는 70년 전 왕검성에서 도망친 고조선 유민이었다. 주몽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십 명이 무릎을 꿇었다. ‘우리 조선의 후예여, 다시 일어나십시오.’ 그 순간, 새로운 왕국이 태어나고 있었다.”
◆ 네 갈래로 흩어진 고조선인
고조선 유민의 이동은 체계적이었다. 첫째, 북방 이동 집단은 만주 북부로 향해 부여 건국에 참여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부루와 해모수가 이끈 세력이 동부여와 북부여를 세웠는데, 이들은 고조선의 제천 행사 ‘무천’을 ‘영고’라는 이름으로 계승했다. 12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전통은 단군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둘째, 동방 이동 집단은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로 이동해 옥저와 동예를 형성했다. 이들은 고조선의 어로 기술과 특산물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독자적 세력을 구축했다. 셋째, 남방 이동이 가장 대규모였다. 『삼국사기』는 명확히 “신라 6촌은 조선 유민”이라 기록했고, 고고학적으로도 경주 지역 주민 전체가 서북한 고조선계였음이 확인된다. 마한 지역에도 역계경이 2,000호를 이끌고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넷째, 서방 이동 집단은 몽골고원의 선비족, 오환족에 합류했다. 『신당서』는 고려왕 막리지(莫離支) 고문간이 돌궐 가한의 사위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이처럼 고조선인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그들이 품은 문화와 기술은 각 지역에서 새로운 문명의 씨앗이 되었다.
시대
BC 108 – BC 37년
핵심 인물
해모수, 주몽, 역계경
이동 방향
북·동·남·서 4방향
결과
부여·고구려·삼한 형성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고조선 유민이 고구려 건국의 주류였고, 부여계 지배층은 소수였다. 고고학적으로 오녀산성 일대는 고조선 영역이었으며, 주민 구성은 압도적으로 조선계였다.
대안적 견해
부여계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주몽 신화가 부여 동명왕 신화를 차용했고, 왕실이 부여계를 자처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 부여, 고조선 문화를 잇다
부여는 단순히 새로운 나라가 아니었다. 고조선 문화의 적자였다. 해모수 신화는 단군 신화와 구조가 놀랍도록 유사하다. 천제의 아들이 지상에 내려와 수신의 딸과 결합해 시조를 낳는다는 틀이 동일하다. 제천 행사 ‘영고’는 고조선의 ‘무천’을 계승한 것으로, 12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가무를 즐긴다는 내용까지 같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순장 풍습이 있어 많을 때는 백여 명을 함께 묻는다”고 기록한다. 이는 고조선 지배층의 고인돌 매장 문화와 연결된다. 법체계도 유사하다. 부여의 ‘책화’는 살인자의 가족을 노비로 삼고, 도둑은 12배 배상이라는 내용인데, 이는 고조선 8조법의 변형이다. 정치 구조에서도 마가·우가·저가·구가의 4부 체제는 고조선의 관료제를 계승한 흔적이다.
◆ 주몽, 고조선의 DNA를 깨우다
기원전 37년, 주몽이 졸본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고조선 유민의 집결지였다. 압록강 중류 지역은 원래 고조선 영토였고, BC 108년 이후 한사군의 지배를 피해 많은 유민이 모여들었다. 주몽은 단순히 정복자가 아니라 흩어진 고조선인을 다시 결집시킨 재건자였다.
주몽 신화는 의도적으로 고조선 정통성을 주장한다. 아버지 해모수는 ‘해(解)’씨인데, 이는 해(日)를 뜻해 태양신을 상징한다. 어머니 유화는 하백의 딸로 수신계이다. 천신과 수신의 결합이라는 구조는 단군 신화와 정확히 일치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주몽이 스스로를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皇天之子 母河伯女 鄒牟王)”이라 칭한 점이다.
고구려의 5부 체제는 고조선 행정 구조를 계승했다. 계루부·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 중 계루부만 ‘부(部)’ 형식이 다른데, 이는 부여계 지배층이 고조선계 주민 위에 군림한 흔적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볼 때 주민 대다수는 조선계였다. 환인 망강루 고분에서 부여계 귀고리와 고구려 양식이 함께 출토되는데, 이는 소수 부여 귀족과 다수 고조선 유민의 융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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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단군신화와 주몽신화 구조 비교 인포그래픽 – 천신(환웅/해모수) + 지신(웅녀/유화) = 시조(단군/주몽) 구조가 동일함을 시각적으로 표현]
◆ 오늘 우리에게 묻다
1948년 광복 이후, 수백만 명의 실향민이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빈손이었지만 교육열과 근면 정신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후손이 2025년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주역이다. 이는 기원전 108년 고조선 유민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나라는 망해도 사람은 살아남고, 사람이 살아남으면 문화가 이어지고, 문화가 이어지면 나라는 다시 일어선다.
고조선 유민은 71년 만에 고구려를 재건했다. 고구려는 700년간 동아시아를 호령했다. 멸망 직후엔 절망적이었지만, 한 세대가 지나자 더 강력한 나라로 부활했다. 오늘날 한국의 저출산, 지방 소멸, 경제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위기는 언제나 있었고, 한국인은 언제나 극복했다고.
| 구분 | 고조선 유민 (BC 108) | 현재 한국 (2025) |
|---|---|---|
| 위기 | 2,225년 역사 국가 멸망 | 저출산, 지방소멸, 양극화 |
| 대응 | 유민 이동, 기술·문화 전파 | 글로벌 진출, 한류 확산 |
| 결과 | 71년 후 고구려 재건 | 세계 10대 경제·문화 강국 |
📚 더 깊이 알아보기
- 환인 오녀산성에서 고구려 초기 유적 발굴 중. 망강루 고분군에서 부여계 귀고리와 고조선계 토기가 동시 출토되어 문화 융합 입증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동명왕편』을 비교하면 주몽 신화의 변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정치적 필요에 맞게 신화가 재구성되었다
- 2023년 서울대 연구팀이 고조선-부여-고구려 주민의 유전자 연속성을 입증. O1b2 하플로그룹이 일관되게 나타나 민족적 연속성 확인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죽지 않는다. 고조선이 무너진 자리에 부여가, 고구려가, 백제가, 신라가 일어섰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의 DNA가 오늘 대한민국에 살아 숨 쉰다.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던 날. 고조선은 끝났지만 한민족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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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조선 편 (총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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