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이 다시 세계를 설득하는 방식은 빠르면서도 집요하다. 봉지 하나가 끓는 물과 만나면 즉석의 위안이 되고, 그 위안이 스크린과 숏폼(짧은 영상 콘텐츠)에서 반복될 때 취향은 문화가 된다. 2025년, 한국 라면(K-라면)은 단순한 수출 품목의 자리를 넘어 글로벌 문화 아이콘으로 확장하며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 [코리안투데이] 상품진열대에서 라면을 고르고 있는 모습(사진제공: 뉴시스, 조선일보) ⓒ 박찬두 기자 |
관세청 자료에 따르면 2025년 1~11월 누적 라면 수출액은 약 2조 390억 원(13억 8,176만 달러)으로 집계됐다. 사상 처음으로 ‘2조 원 시대’에 진입한 기록이다. 이 수치는 전년도 전체 실적(12억 4,838만 달러)을 11개월 만에 앞질렀다는 점에서 속도까지 증명한다. 2015년 이후 11년 연속으로 사상 최대 수출액을 경신 중이라는 흐름도 이어졌다. 2024년 10억 달러를 돌파한 뒤, 2025년에는 ‘연간’이라는 시간 단위를 앞질러 버린 셈이다.
![]() [코리안투데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는 컨테이너(사진제공: Ali Mkumbwa) ⓒ 박찬두 기자 |
이 장면을 과거로 되감으면, 라면 수출의 역사는 한국 산업사의 결을 그대로 품고 있다. 태동기는 1960년대다. 1963년 삼양식품이 국내 최초 라면을 출시한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는 식량난 해결과 경제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수출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성장기는 1990~2000년대에 본격화됐다. 1998년 국내 라면 매출이 1조 원을 돌파하며 해외 시장 공략이 가속했고, 농심 등 주요 기업은 중국과 미국에 현지 생산 공장을 설립해 글로벌 유통망을 확보했다. 그리고 도약기인 2015년 이후, K-라면은 ‘매년 최고치’라는 문장을 일종의 연중행사처럼 반복해 왔다.
![]() [코리안투데이] 짜파구리(사진제공: coreanmart) ⓒ 박찬두 기자 |
이번 상승의 핵심 동력은 ‘문화–산업 선순환’으로 요약된다. 영화 <기생충> 속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를 섞어 끓이는 조합)가 세계 대중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고, 이후 <오징어 게임> 같은 글로벌 히트작의 라면 먹방 장면은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구체적 이미지로 작동했다. 여기에 최근 화제작으로 언급된 데몬 헌터스(케데헌)> 등 K-콘텐츠 전반에서 ‘먹는 장면’이 단지 소품이 아니라 생활양식의 상징으로 배치되며, 라면은 서사의 한복판에서 세계인의 일상으로 침투했다.
![]() [코리안투데이] 불닭볶음면(Hot Chicken Flavor Ramen, Buldak Ramen)(사진제공: 나무위키) ⓒ 박찬두 기자 |
SNS는 이 흐름에 엔진을 달았다.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을 중심으로 한 매운맛 챌린지가 유튜브와 틱톡에서 확산되며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참여형 팬덤을 형성했다. ‘누가 더 맵게, 더 창의적으로 먹는가’라는 놀이가 반복될수록 제품은 하나의 문화적 밈(meme·온라인에서 확산되는 유행 코드)이 됐고, 소비는 인증과 공유를 통해 재생산됐다.
![]() [코리안투데이] 할람인증마크. 한국할랄인증원에서 발급하는 한국할랄마크는 SMIIC(이슬람국 표준기준 및 도량기구)의 인증절차를 완료 후 한국을 대표하는 할랄마크로 공식 등록되어 세계 이슬람국가에서 사용이 가능하다.(사진제공: 한국할람인증원) ⓒ 박찬두 기자 |
기업의 전략은 감각적 유행을 지속 가능한 시장으로 굳히는 방향으로 정교해졌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비건 라면, 이슬람권 소비를 위한 할랄 인증 제품(이슬람 율법에 부합하는 인증) 등 국가·문화권별 맞춤형 제품이 늘었고, 월마트·코스트코 같은 대형 유통망 입점 확대가 ‘접근성’이라는 마지막 문턱을 낮췄다. 그 결과 중국과 미국이 부동의 1·2위 수출국 지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네덜란드 등 유럽 시장과 동남아시아 시장에서도 성장세가 가파르게 나타난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 [코리안투데이] 컨테이너에 담겨 전 세계로 수출되어 나가는 상품울 실은 선박의 모습(사진 제공: Ian Taylor) ⓒ 박찬두 기자 |
K-라면의 파급력은 ‘그릇 밖’으로도 번진다. 라면과 함께 먹는 고추장 등 소스류의 수출이 전년 대비 약 7~18% 증가하고, 김치 등 연관 K-푸드의 수출 증가로 이어지는 시너지가 포착된다. 하나의 맛이 다른 맛을 끌어올리는 연쇄효과다. 라면이 세계인의 식탁에 안착할수록, 한국 식문화의 어휘가 함께 확장된다.
![]() [코리안투데이] 신리면 블랙(사진제공: 나무위키) ⓒ 박찬두 기자 |
해외 평판을 둘러싼 서사도 흥미롭다. 뉴욕타임스(NYT) 산하 리뷰 매체 ‘와이어커터(Wirecutter)’가 2025년 1월 전 세계 35개 라면을 비교해 한국 라면 7종을 상위권에 포함시켰다는 내용이 회자된다. 특히 농심 ‘신라면 블랙’은 진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로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라는 평판을 유지한다는 평가가 더해지며, 미주 시장에서의 존재감을 부각한다. 농심이 뉴욕의 한식당들과 협업한 ‘Seoul in the City’ 행사처럼, 라면을 ‘창의적 요리’로 재해석해 고급 식문화의 경험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도 이어진다. 간편식이었던 라면이 미식(Fine Dining·정찬 중심의 고급 외식 문화)의 문법을 빌려 새 무대에 오르는 장면이다.
![]() [코리안투데이] 일본의 식품회사 니신식품(사진제공: 나무위키) ⓒ 박찬두 기자 |
시장 판도 변화도 언급된다. 미국 코스트코 등 대형 리테일 매장의 아시안 카테고리에서 한국 라면이 일본 제품을 밀어내고 메인 매대를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관측은, 과거 ‘라멘(Ramen)’으로 통칭되던 시장이 ‘K-라면’이라는 독자 카테고리로 재편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 최대 라면 기업 니신(Nissin)의 미주 총괄 대표가 “한국 경쟁사들이 소비자 트렌드를 포착하는 데 훨씬 앞서 있다”며 영향력을 인정하고 경계했다는 대목 역시 상징적 장면으로 인용된다.
![]() [코리안투데이] 신라면 툼바(사진제공: 농심) ⓒ 박찬두 기자 |
브랜드 신뢰를 둘러싼 데이터도 서사의 밀도를 높인다. 2025년 11월 기준, 글로벌 소비자 빅데이터를 분석한 브랜드 평판 조사에서 신라면, 불닭볶음면, 짜파게티가 최상위권을 유지한다는 정리는 ‘인지도’가 아니라 ‘지속적 선택’의 영역에서 경쟁력을 확인하는 근거로 읽힌다. 로컬라이징(현지화)의 성과로는 ‘신라면 툼바’처럼 매운맛과 크림을 조화시킨 신제품이 일본 ‘닛케이 트렌디’ 선정 ‘2025 히트상품 베스트 30’에 한국 라면 최초로 이름을 올리며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사례가 거론된다. 익숙한 맛 위에 낯선 자극을 얹는 방식이, 국경을 넘는 설득의 형태가 된 셈이다.
![]() [코리안투데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라면 한 그릇(사진제공: 나무위키) ⓒ 박찬두 기자 |
앞으로의 전망도 비교적 낙관적이다. 전문가들은 K-콘텐츠의 인기가 일시적 현상을 넘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정착함에 따라 K-라면 수출이 2029년까지 연평균 약 12%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본다. “한류 콘텐츠 수출이 1억 달러 증가할 때 소비재 수출은 약 1.8억 달러 증가한다”는 분석도 함께 제시되며, 정부와 업계가 ‘K-콘텐츠-K-푸드’를 연계한 공동 마케팅과 유통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제언으로 이어진다. 콘텐츠가 감각의 문을 열고, 산업이 그 문을 넓히며, 소비가 일상으로 들어오는 구조다.
결국 라면의 세계화는 ‘저렴하고 빠른 음식’의 확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한 나라의 생활방식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동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뜨거운 물을 붓는 순간 시작되는 짧은 조리 시간은, 어쩌면 세계가 한국의 맛을 받아들이는 데 걸린 시간의 비유일지도 모른다. K-라면은 지금, 가장 대중적인 그릇으로 가장 국제적인 이야기를 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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