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을 왜 ‘흥인지문’이라고 했는가

‘동대문’을 왜 ‘흥인지문’이라고 했는가

  

조선 초기 한양은 외곽이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북에 각각 커다란 대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성 안을 문안또는 성안이라 불렀다.

 

‘동대문’을 왜 ‘흥인지문’이라고 했는가

 [코리안투데이동대문의 현판 興仁之門의 모습(사진제공네이버 블로그ⓐ 박찬두 기자

 

흥미롭게도 4대문에는 통행 금지 시간이 정해져 있어 밤이 되면 일정한 시각 이후 통표(통행증)가 없는 사람은 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이는 도성의 치안을 유지하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였다.

 

 [코리안투데이동대문의 옛모습(자료제공동대문구청ⓒ 박찬두 기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수도 송악(현재의 개성)을 떠나 1394, 즉위 3년째에 한양으로 천도했다. 이듬해부터 도성 축조 계획을 세워 한양 주변에 성을 쌓고, ···북 네 방향에 각각 큰 대문을 설치했다.

 

 [코리안투데이동대문의 옛모습(자료제공:동대문구청ⓒ 박찬두 기자

 

당시 기록에 따르면 동대문은 태조 5(1396) 1월에 공사를 시작했으나, 여름철 장맛비로 인해 토성이 붕괴되었다. 이후 1397(태조 6) 127, 태조가 직접 동대문을 방문해 옹성(성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작은 성벽)의 터를 살폈고, 같은 해 428일에도 왕이 다시 동대문에 나가 옹성을 둘러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동대문의 옹성이 1월에 착공되어 4월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안투데이동대문 야경(사진제공짤진이ⓒ 박찬두 기자

 

조선 시대에는 유교의 오상(五常) 사상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이는 인(), (), (), (), ()으로 구성되며, 당시 조정은 이 중 네 가지 덕목(, , , )을 각 대문의 이름에 담았다.

 

이에 따라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라 이름 지었다. ()은 서울 한가운데에 위치한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으로 반영되었다.

 

 [코리안투데이동대문의 낮의 모습(사진제공블로그 angeljohan) ⓐ 박찬두 기자

  

동대문(흥인문)은 특별한 이유로 흥인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서울의 지형은 서··북쪽이 산과 고지로 이루어져 있어 균형을 이루지만, 동대문이 위치한 동쪽은 지대가 낮았다. 이 균형을 보완하기 위해 갈지()’ 자를 이름에 추가해 흥인지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흥인지문의 현판은 글씨를 가로로 두 줄로 써서 부족한 기운을 보충하고자 했다. 이는 당시 풍수지리설을 적용한 독특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코리안투데이동대문의 밤의 모습(사진제공블로그 angeljohan) ⓐ 박찬두 기자 

 

한양의 4대문과 그 이름에는 유교 사상과 풍수지리, 도시 관리의 원칙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통행 금지 제도, 대문 명칭의 유교적 의미, 풍수지리의 적용 등은 단순한 성곽 설계 이상의 문화적, 사상적 깊이를 보여준다. 조선 시대 도성의 구조는 치밀한 계획과 철학적 기반 위에 세워진 결과물임을 잘 알 수 있다.

 

                                                                         (자료제공: 동대문구청 문화관광과 문화예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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