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세스카 여사가 남긴 마지막 고백: 이승만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기록

 

30년 전 세상을 떠난 프랜세스카 여사가 88세에 남긴 회고록 중 일부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였던 이승만의 인간적 면모, 그와의 첫 만남, 사랑, 신혼,

가난 속에서도 품위를 지킨 삶을 기록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아직 완전한 원본을 구하긴 어렵지만, 지금 남은 기록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주는 문장들입니다.

  

※ 원문 표현의 흐름과 의미는 유지하면서, 읽기 편안하도록 매끄럽게 다듬고 확장했습니다.※

 

 [코리안투데이] 머릿돌39. 프랜세스카 여사가 남긴 마지막 고백: 이승만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기록© 지승주 기자

  

프랜세스카 여사는 생애 마지막 무렵, 조용히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나이 올해로 여든여덟. 내세울 공덕은 없지만 행복했습니다. 하나님과 국민, 그리고 아들 인수 내외의 보살핌 덕분입니다.”

 

그 말 안에는 한 평생을 조국을 위해 달려간 남편 이승만 대통령을 곁에서 지켜본 한 여인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깊은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루지 못한 몇 가지 소원이 남아 있었습니다.

남편의 꿈이었던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날을 보고 싶었고, 손자들이 장성하여 어른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또 남편의 삶을 기리기 위한 사료관과 기념도서관이 세워지는 것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그 소원들이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이 땅에 머물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묶어두었습니다.

 

●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순간

 

1933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가 한창이던 시절, 만주 사태로 고통받는 조선 동포들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이승만 박사는 홀로 세계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프랜세스카는 어머니를 모시고 유럽 여행 중이었고,

제네바의 레만호수 옆 호텔 ‘드 라 뤼시’ 식당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 앉게 됩니다.

 

식당이 가득 차 합석을 부탁받은 자리에서

그녀는 의연하고 고귀한 기품을 지닌 한 동양신사를 보았습니다.

정중한 프랑스어 인사, 단정한 태도,

그리고 예상과 달리 매우 소박한 식사를 주문하는 모습까지…

 

그 신사는 ‘독립운동가’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음식 앞에서 조용히 예의를 갖추고 기도하는 태도는

프랜세스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그때 돌아온 답은 단호하면서도 자부심으로 가득한 한 단어였습니다.

“코리아.”

 

그 한마디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첫 장면이 되었습니다.

 

● 인연이 이어지다

 

프랜세스카는 독립을 위해 세계를 누비던 그의 모습을 신문 기사로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기사를 오려서 익명으로 호텔에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뜻밖에도 정중한 감사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대화가 되었고,

대화는 만남이 되었으며,

만남은 결국 사랑으로 깊어졌습니다.

 

그때 그녀는 33세의 유능한 통역사이자 속기 전문가였고,

그는 58세의 조국 상실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프랜세스카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 곁에는 늘 일손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능력과 시간을 기꺼이 내어 그 일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의 가난한 독립운동가를 돕는 딸이 못마땅했지만,

프랜세스카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족의 반대를 넘어

두 사람은 1934년 미국에서 조촐하지만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 신혼의 시간들 — 기쁨과 고됨이 함께한 날들

 

두 사람의 결혼은 한국인들에게도, 오스트리아의 그녀의 가족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가 외국 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은 동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프랜세스카 역시 외로운 이국 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혼이었던 그들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프랜세스카는 남편을 위해 김치를 배우고,

그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 매일 새벽 냉수 한 잔을 권하며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집안에는 늘 성경이 있었고,

그들의 삶에는 늘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자리했습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들의 새벽 성경 읽기와 기도는 단 하루도 변함이 없었다고 합니다.

 

●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삶을 함께 견디다

 

결혼 후 두 사람이 마주한 현실은 결코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야 했고,

고난 속에서 하루 두 끼를 먹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랜세스카는 말합니다.

“남편의 가난은 궁핍이 아니라 품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먹는 음식 앞에서도 기도하며

그것이 모든 동포에게도 허락되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기도와 눈물,

그리고 가난 속에서도 고고함을 잃지 않는 모습은

프랜세스카를 더욱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 이승만의 인간적인 면모

 

프랜세스카의 회고록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 이승만’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 유머로 사람을 웃기는 따뜻한 성품

• 붓글씨와 시 쓰기를 즐기던 고요한 시간

• 낚시를 하되, 잡은 고기는 놓아주는 청렴함

• 나무와 꽃을 사랑하던 자연인

• 분노가 쌓이면 장작을 패며 마음을 비우던 강한 정신력

• 학생처럼 항상 공부하는 자세

• 술과 담배를 멀리하며 절제된 생활을 지킨 엄격함

 

무엇보다 프랜세스카 여사는 남편을

“늘 젊고 건강했던 사람”

“민족과 신앙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사람”

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녀의 글에서는

‘위대한 대통령’보다

‘존경스러운 남편’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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