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조선 편] 제15화: 한사군의 설치 – 고조선 이후의 한반도

[역사는 살아있다 – 고조선 편] 제15화: 한사군의 설치 – 고조선 이후의 한반도

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고조선 편

제15화: 한사군의 설치 – 고조선 이후의 한반도

2,225년의 역사가 끝나는 순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이 멸망한 그 자리에 한나라가 세운 것은 4개의 군현, 한사군이었다.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 이 네 개의 이름은 이후 400년 동안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했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한나라의 지배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갔을까? 토착민과 한인이 공존했던 낙랑은 어떤 곳이었을까?

평양 대동강 남안,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낙랑토성. 그곳에서 출토된 화려한 칠기와 청동거울, 그리고 한자로 쓰인 목간들은 2,000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문화적 충돌과 융합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시대의 풍경

기원전 108년 여름,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직후 곧바로 영토 분할에 착수했다. 고조선의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4개 군으로 나눈 것이 바로 한사군이다. 낙랑군은 평양을 중심으로 25개 현을 거느렸고, 진번군은 황해도 일대에, 임둔군은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에, 현도군은 고구려 서북방에 설치되었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의 인구는 최대 62,812호, 약 40만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상당한 규모의 인구였다. 그러나 이 숫자가 모두 한인(漢人)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고조선의 토착민이었고, 한나라에서 파견된 관리와 이주해온 한인은 소수에 불과했다.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조선을 정벌하여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삼았다.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이다.”

– 『한서』 권28, 지리지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 한나라

한 무제의 전성기. 흉노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남쪽으로는 남월을 정복. 동방의 고조선까지 정복하며 최대 영토 달성.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 진출

🗿 로마

공화정 말기.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으로 혼란. 기원전 60년 제1차 삼두정치(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시작 전

🏺 중동

파르티아 제국 전성기. 미트리다테스 2세 치세. 실크로드 무역으로 번영. 로마와 동서 무역의 중개자 역할

[이미지: 평양 낙랑토성 전경과 한사군 지도 –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의 위치를 표시한 기원전 1세기 한반도 지도.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낙랑토성의 모습과 주변 25개 현의 분포]

📜 그날의 현장

“기원전 108년 가을, 평양. 낙랑군 초대 태수가 부임했다. 그의 일행은 불과 수십 명. 그러나 그가 다스려야 할 백성은 수십만이었다. 대부분은 여전히 조선말을 쓰고, 조선의 풍습을 따르는 고조선의 백성들이었다.”

“거리에는 한나라 관복을 입은 관리들이 보이지만, 시장의 상인들은 여전히 고조선 시대와 같은 옷을 입고 있다. 한나라 오수전 화폐가 유통되지만, 물물교환도 여전하다. ‘이곳은 더 이상 조선이 아니다. 한의 영토다.’ 태수가 선언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한사군은 처음부터 완성된 체제가 아니었다. 기원전 108년 설치 당시에는 4개 군이 모두 존재했지만, 불과 26년 만인 기원전 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었다. 토착민의 저항이 너무 거셌기 때문이다. 진번군은 낙랑군에, 임둔군은 현도군에 각각 병합되었고, 낙랑군은 남부도위와 동부도위를 설치해 이 지역을 간접 통치했다.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마저 토착민의 반발로 요동 지방으로 후퇴했다. 결국 한반도에 실질적으로 남은 것은 낙랑군뿐이었다. 그러나 이 낙랑군조차도 한나라의 직접 통치가 아니라, 토착 세력과의 타협으로 유지되었다. 평양 정백동 고분에서 발견된 ‘부조예군(夫租濊君)’, ‘부조장인(夫租長人)’ 인장은 고조선계 토착 지배층이 여전히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2005년 평양에서 출토된 목간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이 목간에는 낙랑군 25개 현의 인구가 기록되어 있는데, 총 62,812호에 406,748명이었다. 이는 당시 한반도 북부 인구의 대부분이 낙랑군 체제 안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토착민이었고, 한나라는 기존의 고조선 사회 구조를 상당 부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간접 통치했다.

설치 연도

BC 108년(낙랑·진번·임둔), BC 107년(현도)

낙랑군 인구

62,812호, 약 40만 명 (최대 시)

존속 기간

낙랑군 420년(BC 108~AD 313), 진번·임둔 26년

멸망

AD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낙랑군 축출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한사군, 특히 낙랑군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에 위치.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3,000여 기의 고분, 봉니, 목간 등이 이를 증명. 다만 한나라의 직접 통치는 초기에 국한되고, 대부분 기간은 토착 세력과의 타협적 간접 통치

대안적 견해

일부 학자는 한사군이 요서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 그러나 2014년 북경 인근에서 발견된 “낙랑군 조선현인” 명문 벽돌을 근거로 요서설을 주장하나, 평양 일대 대량 유물과 비교 시 설득력 약함

낙랑 고분의 비밀

평양 석암리 9호분은 낙랑군 최고급 무덤 중 하나다. 1916년 발굴 당시 기원 8년 명문이 새겨진 칠기가 출토되어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무덤 구조는 구덩이 속에 큰 나무곽을 만들고 그 속에 다시 나무곽과 나무널을 넣는 복잡한 형식이다. 껴묻거리로는 칠기, 청동거울, 금제 장신구 등 중국에서 수입된 고급 물품들이 가득했다.

정백동 1호분에서는 채협총이라 불리는 화려한 칠기 공예품이 출토되었다. 붉은 칠 위에 그려진 정교한 문양은 당시 한나라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여준다. 석암리 9호분의 금제 띠고리는 순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용과 봉황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무덤 주인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발견은 정오동 고분에서 출토된 논어 죽간이다. 이는 한자 문화가 낙랑을 통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 증거다. 왕광묘에서는 후한 시대 인장이 발견되어 낙랑군이 400년 넘게 지속되었음을 증명한다.

오늘 우리에게 묻다

한사군, 특히 낙랑군의 역사는 한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한반도는 고대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며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사군을 부정하거나 그 위치를 한반도 밖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그것의 해석을 구분하는 것이다. 낙랑군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했다는 것은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3,000여 기의 고분과 수많은 유물로 증명된다. 하지만 그것이 “한반도가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낙랑군은 초기 직접 통치 시도 후 곧바로 토착 세력과의 타협적 간접 통치로 변화했고, 결국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었다.

오히려 낙랑군의 역사는 한민족의 저항과 자주성을 보여준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26년 만에 토착민의 저항으로 폐지되었고, 현도군은 요동으로 쫓겨났다. 낙랑군조차 한나라의 직접 통치는 불가능했고, 토착 세력이 실질적 권력을 유지하는 이중 구조였다. 그리고 결국 고구려가 낙랑을 완전히 축출하며 420년 역사를 끝냈다.

구분 낙랑군 시대 (BC 108~AD 313) 현재 한반도
통치 구조 한인 관리 + 토착 세력 이중 구조. 초기 직접 통치 → 점차 간접 통치로 전환 남북 분단 상황. 각각 독립적 정치 체제 유지. 외세 영향 속 자주성 추구
문화 한자 문화 전파. 중국 선진 기술 도입. 그러나 토착 문화도 병존 (세형동검 문화 지속) 한자 문화권이지만 독자적 한글. 서구 문화 수용하되 고유 문화 보존. K-Culture 세계 전파
저항과 독립 토착민 지속 저항. 진번·임둔 26년 만에 폐지. 313년 고구려의 완전 축출로 종결 일제 36년 지배 극복. 1945년 해방. 외세 개입 속에서도 자주적 발전 추구

[이미지: 평양 석암리 9호분 출토 유물 – 화려한 채칠 칠기와 금제 띠고리, 청동거울이 진열된 모습. 왼쪽에는 고조선 시대 비파형동검, 오른쪽에는 낙랑 시대 한나라식 칠기를 배치하여 문화의 변화와 연속성을 동시에 보여줌]

📚 더 깊이 알아보기

  • 2005년 평양에서 출토된 초원 4년(BC 45) 호구부 목간은 낙랑군 25개 현의 정확한 인구와 위치를 기록하고 있어 낙랑군 연구의 결정적 자료가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련 자료 확인 가능
  • 평양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은 둘레 7km에 달하는 대규모 토성으로, 한사군 시대 행정 중심지였다. 북한 학계에서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
  • 1993년 북한이 발표한 정백동 364호분 출토 논어 목간은 기원전 1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아시아 최고(最古) 논어 판본 중 하나로 평가됨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낙랑군의 420년은 한민족에게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한자 문화와 선진 기술을 받아들여 더 큰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시간이기도 했다. 토착민은 저항과 타협을 반복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냈고, 결국 고구려가 이를 완전히 축출하며 자주성을 회복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다. 저항하고, 적응하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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