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이 기울면 나라에 큰 일이 온다

 

서울 동대문(흥인지문)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후기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튼튼해진 지금과는 달리, 초기의 동대문은 나무로 만든 대문이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동대문의 기울기는 조선의 역사를 반영하는 상징으로 여겨졌다.

  

동대문이 기울면 나라에 큰 일이 온다

 [코리안투데이] 동대문에 얽힌 옛이야기 – 단종과 동대문(이미지제공: 동대문구청) 박찬두 기자

 

단종과 동대문의 동남쪽 기울기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이 강원도 영월 땅 청령포로 귀양을 떠난 후였다.

 

그때 단종의 왕비였던 송 씨는 단종을 따라서 함께 가지 못하고 궁궐에서 쫓겨난 후 동대문 밖에 있는 정업원 암자에 홀로 남아 아침저녁으로 멀리 강원도 영월 땅에 계신 낭군인 단종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딱한 사정이 정업원 근처 민가에 알려지자, 동대문 밖에 사는 마음씨 착한 아낙네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서로 다투어가며 정업원에 살고 있는 단종비 송 씨를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러나 가난한 민초들인 그들이 단종비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집에서 키우는 닭 한 마리 정도였고, 아니면 쌀이나 보리쌀 한 되 또는 집 근처 텃밭에서 나는 푸성귀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바깥에 나갔던 상궁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단종비 송 씨에게 아뢰었다.

 

마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생겼사옵니다.”

 

기이한 일이라니?”

 

 

어서 말해 보거라. 기이한 일이 생겼다 하지 않았느냐?”

 

글쎄 동대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하옵니다.”

 

상궁은 송 씨의 눈치를 보며 겨우 고했다.

 

아니, 뭐야? 동대문이 기울어졌다 했느냐?”

 

그렇습니다, 마마.”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종비 송 씨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예전부터 동대문이 기울면 나라에 큰일이 온다는 말을 자주 들은 바 있었다.

 

또 무슨 변이 나려고 그러는고?”

 

송 씨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낭군인 단종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동대문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 하더냐?”

 

송 씨가 상궁 나인에게 물었다.

 

마마……. 공교롭게도 동남쪽이라 하옵니다.”

 

아니, 뭐야? 동남쪽이라고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동남쪽이라면? 상감마마께서 가 계신 강원도 영월 쪽이 동남쪽이 아니더냐!”

 

안 그래도 요 며칠 사이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송 씨로서는 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단종비 송 씨는 동대문이 동남쪽으로 기울었다는 상궁 나인의 말을 듣고 그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단종은 사약을 받고 말았다. 

 

  [코리안투데이] 동대문에 얽힌 옛이야기 – 광해군의 묘(사진제공: 나무위키ⓒ 박찬두 기자

 

광해군 시대, 북서쪽으로 기운 동대문

 

인조반정 때도 동대문은 기울었다.

 

단종이 유배지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뜬 후 다시 100여 년이 지난 광해군 말년에도 동대문이 다시 또 기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단종 때와는 달리 동남쪽이 아니라 북서쪽으로 동대문이 기울었다.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소문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가뜩이나 광해군의 폭거에 뒤숭숭하던 민심은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전국적으로 이 소문을 퍼뜨렸다.

 

동대문이 기울면 국난이 온다는데 이제 곧 나라에 큰 변고가 나겠지.”

 

이번에는 동대문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 하던가?”

 

북쪽으로 기울었다지?”

 

북쪽 오랑캐들이 침범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삼삼오오로 모여 입소문을 키우며 이야기를 나눴다. 자연히 민심이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광해군 곁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른 간신 이이첨이 포졸들을 풀어서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잡아 엄벌에 처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대문이 기울었다는 소문이 불식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그해 동대문이 북서쪽으로 기울었던 그대로 한양의 북서쪽인 홍제원에서 인조를 옹립하는 반정군이 군사를 일으켜 간신 이이첨과 광해군을 궁궐에서 내쫓았다.

 

그 또한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대사건이었으며, 조선의 대변혁을 예고한 상징으로 남았다. 

 

 [코리안투데이동대문에 얽힌 옛이야기 – 임오군란과 동대문(이미지제공동대문구청ⓒ 박찬두 기자

 

구한말 임오군란과 동대문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구한말에도 동대문이 동남쪽으로 기울었다.

 

그 당시 고종은 쇄국정책을 고집했던 대원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화정책을 쓰고 있을 때였다.

 

왜놈들이 우리 땅을 맘대로 유린하고 있으니 어찌 조상들이 노하지 않겠소?”

 

그래도 대원군께서 정치는 잘했어. 그때는 멀쩡하던 동대문이 이제 와서 왜 기울겠어?”

 

민씨 일파들이 나라를 들어먹으니까 경고를 주는 것이 아니겠어?”

 

다시 또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고종 19(1882) 6, 결국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명성황후인 민씨 일파에 의해 유지되던 민씨 정권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구식 군대를 도태시키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했다. 일본군대를 본뜬 군제였다.

 

그 당시 서울에 있었던 구식 군대는 실상 군인이라 하기보다는 도시 하층민, 다시 말해 영세 소상인이나 영세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 노동자·농민 중에서 충원된 사람들로 각자 가족을 거느리기 위해 부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복무하는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신식 군대가 발족하자 구식 군영 군인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소속된 군인들에게는 무기며 의복 등 여러 면에서 좋은 대우를 해주고 봉급도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지급했으나, 구식 군영 군인들은 자꾸만 실직을 당하며 몇 달치의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임오군란 이전에 이미 구식 군인들 사이에서는 동요와 반항의 기운이 고조되었고, 군란 직전 해인 1881년에도 두 건의 폭동 준비 사건이 있었다.

 

정부는 이를 무마하려고 18826월에 밀린 급료 1년치 중에서 1개월 분을 쌀로 지급했지만, 군인들이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어 분노를 샀다.

 

결국 69, 군인들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봉기했다.

 

 

 [코리안투데이] 선혜정 터(사진제공: 나무위키ⓒ 박찬두 기자

 

군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선혜청을 습격해 불태우고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질렀으며, 별기군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폐쇄했다.

 

다음 날에는 창덕궁으로 쳐들어가 대원군의 친형 흥인군 이최응을 비롯해 민씨 일파 고관들을 살해했다. 

 

 [코리안투데이] 임오군란의 상황도(사진제공: 나무위키ⓒ 박찬두 기자

  

그 당시 명성황후 민비는 군란을 피해 변장을 하고 창덕궁을 빠져나와 동대문을 거쳐 장호원으로 피신했는데, 공교롭게도 장호원은 동대문이 기울었던 서울의 동남쪽 방향이었다.

 

이렇게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기울었던 동대문은 이후 보수공사를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면서 수도 서울의 동쪽을 의연히 지키고 있다.

 

역사 속 동대문의 기울기는 단순한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 민심의 동요를 상징했다. 단종의 비극, 인조반정, 임오군란 등 역사적 사건마다 동대문은 민심의 거울로 작용했다. 앞으로 동대문이 또다시 기울지 않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기울기가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여전히 흥미로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자료제공: 나무위키, 동대문구청 문화관광과 문화예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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