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산업의 서열과 판도가 다시 쓰이고 있다. 한국의 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이제 더 이상 지역적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공연 산업의 골격을 구성하는 핵심 주체로 올라섰다. 하이브(HYBE)가 전 세계 공연 시장의 ‘빅4’ 프로모터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은, 단지 순위 상승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곧 K-팝이 세계 무대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변했고, 산업의 중심축이 서서히 재편되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 [코리안투데이] 방탄소년단의 모습(사진제공: amazon.ca) ⓒ 박찬두 기자 |
이번 도약은 어느 한 팀의 기적적인 선전으로 얻어낸 일시적 성과가 아니다. 방탄소년단(BTS)의 폭발적인 성공을 단순한 우연이나 시대적 행운으로 소비하지 않고, 멀티 레이블 전략과 플랫폼 비즈니스, 그리고 공격적인 글로벌 행보로 치환한 결과에 가깝다. 하이브는 스스로를 ‘앨범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콘텐츠와 팬덤을 기반으로 공연·플랫폼·기술을 엮어내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재정의하는 중이다. 이번 ‘빅4’ 등극은 그 중간 결산에 해당하는 장면이다.
하이브의 서사는 2013년 방탄소년단의 데뷔와 함께 급격히 가속되었다. 당시만 해도 작은 기획사 소속의 신인 보이그룹에 지나지 않았던 BTS는, 치열하게 다듬어진 퍼포먼스와 서사 구조, 디지털 플랫폼에 능숙한 팬덤의 결집력을 발판으로 세계 시장을 정면 돌파했다. 빌보드 메인 차트를 연속해서 석권하고,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오르는 장면은 더 이상 ‘이변’이 아니라, K-팝이 세계 대중음악의 제도권 안으로 편입되었다는 상징적 장면으로 읽혔다.
BTS의 성공은 단순한 숫자 경쟁을 넘어선다. 음원 차트 순위와 앨범 판매량, 유튜브 조회수로 측정되는 상업적 지표는 물론, 팬덤 문화와 SNS를 통해 형성되는 담론의 밀도까지 합쳐지며, 하나의 복합적인 문화 현상으로 수렴되었다. 하이브에게 이 모든 것은 한 그룹의 기적이 아니라 ‘글로벌 확장 가능성’에 대한 명백한 증명서였다. 이 증명서를 손에 쥔 회사는 곧바로 다음 단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의 핵심에는 ‘의존도’라는 단어가 있었다. 특정 아티스트에게 매출과 브랜드 이미지를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군 복무, 건강 문제, 활동 중단, 사회적 논란 등 갑작스러운 변수 하나가 곧 회사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은 K-팝 1·2세대의 역사가 이미 보여준 바였다. 하이브는 이 구조적 위험을 체감했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멀티 레이블 시스템과 인수·합병(M&A, 기업 간 인수와 결합을 통해 외연을 확장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후 하이브는 어도어(ADOR),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 빌리프랩 등 각기 다른 색과 개성을 가진 레이블들을 산하에 두며, 다층적인 레이블 구조를 완성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이들 레이블이 단순한 ‘하청 조직’이 아니라, 고유의 미학과 음악적 방향성을 유지하는 독립적 창작 집단으로 남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상위 본사는 자본과 인프라, 글로벌 네트워크를 제공하고, 각 레이블은 자신만의 철학과 취향을 바탕으로 아티스트를 기획·육성하는 방식이다.
이 구조는 거대 기획사가 하나의 취향과 미학을 전체 회사에 주입하는 방식과 궤를 달리한다. 여러 개의 서로 다른 감수성과 세계관이 느슨하게 연결된 거미줄 같은 구조 속에서, 리스크는 분산되고 창의성은 다변화된다. 하나의 별이 저물어도 전체 하늘이 어두워지지 않는 별자리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 [코리안투데이] 세븐틴의 모습(사진제공: ODKSHOP) ⓒ 박찬두 기자 |
이 전략의 유효성은 최근 빌보드가 발표한 ‘2025 박스스코어(Boxscore) 연간 보고서’에서 정교한 수치로 증명되었다. 박스스코어는 전 세계 공연의 매출, 관객 수, 공연 회차 등을 종합 집계해 공연 시장의 구조를 조망하는 지표다. 통상 공연 업계에서는 이 보고서를 통해 한 해의 흐름과 주요 플레이어의 위상을 가늠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하이브는 라이브 네이션(Live Nation), AEG 프레젠츠(AEG Presents) 등 세계 공연 산업을 장기간 지배해 온 미국·유럽 기반의 거대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글로벌 공연 프로모터 ‘빅4’에 이름을 올렸다. K-팝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그것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전통적 공연 강자들 사이로 진입한 장면은, 산업의 지형이 장기적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성과의 중심에는 세븐틴(SEVENTEEN), 제이홉(J-HOPE), 엔하이픈(ENHYPEN)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월드투어가 단단히 자리한다. 이들은 아시아는 물론 북미, 유럽, 남미 등 다섯 대륙에 가까운 지역을 촘촘하게 누비며, 도시마다 수만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관객을 공연장으로 불러 모았다. 공연은 언어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고, 노래와 몸짓, 스크린 속 연출과 팬들의 떼창이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형성한다.
이들의 티켓 파워는 이제 ‘매진’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되기 어렵다.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서버가 마비되고, 수분 내에 전석이 동나는 광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경험이 팬덤 내부에서 하나의 공통된 기억이자 서사로 이어지고, 오프라인 공연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은 온라인으로, 다시 영상 콘텐츠로, 2차 팬 콘텐츠로 이동하며 공연의 시간과 공간을 수차례 확장시킨다. 공연은 그 자체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팬덤이 재가공해 오래도록 순환시키는 거대한 이야기의 기점이 된다.
팬데믹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글로벌 공연 수요를 기민하게 포착한 점도 눈에 띈다. 이동이 제한되던 시기에 축적된 ‘공연에 대한 갈증’은 규제가 완화되자 곧바로 전 세계적인 티켓 대란으로 표출되었다. 하이브는 이 흐름을 단순한 반짝 특수로 보지 않고, 장기 투어 체계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데 활용했다. 도시별 수요와 팬덤 규모에 따른 공연 회차와 규모 조정, 로컬 파트너와의 협업, 팬 경험을 세심하게 설계한 동선과 무대 구조 등은 이 회사가 공연을 하나의 독립된 산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코리안투데이] 앤하이픈의 모습(사진제공: iMBC 연예) ⓒ 박찬두 기자 |
하이브의 성장 궤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축은 플랫폼 사업이다. 팬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위버스(Weverse)’는 이제 단순한 팬카페의 진화판이 아니라, 전 세계 팬덤을 한데 모으는 거대한 디지털 광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팬들은 아티스트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댓글을 남기고, 굿즈를 구매하며, 때로는 서로의 삶을 나누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낸다.
위버스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콘텐츠와 커머스, 커뮤니티와 공연이 하나의 생태계처럼 결합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영상·사진·텍스트로 구성된 공식 콘텐츠, 공식 상품(굿즈) 판매, 콘서트 티켓팅, 온라인 라이브 스트리밍이 모두 하나의 앱 안으로 통합되어 있다. 플랫폼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데이터와 접점을 소유한다는 뜻이다. 팬들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구매하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곧 다음 콘텐츠와 공연, 상품 기획의 기초가 된다.
하이브는 이 플랫폼을 통해 특정 아티스트의 활동 주기에 휘둘리지 않는 수익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어느 한 팀이 활동을 쉬는 동안에도 다른 레이블의 아티스트들이 플랫폼을 채우고, 팬들은 서로 다른 아티스트의 콘텐츠를 넘나들며 체류 시간을 늘려 간다. 이 과정에서 팬덤은 단일 그룹에 국한되지 않고, ‘위버스 생태계’라는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된다. 그 속에서 공연 기획, 굿즈 생산, 마케팅 전략은 점점 더 데이터 기반의 정밀한 작업으로 변한다.
전문가들은 멀티 레이블 시스템과 위버스 플랫폼의 결합을 하이브의 가장 큰 전략적 자산으로 평가한다. 각 레이블이 서로 다른 아티스트를 키우고, 다른 색과 서사를 만들어 내지만, 팬덤의 주요 접점은 하나의 플랫폼에 집중된다. 여럿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걷되 하나의 광장에 모여드는 구조다. 단일 라인업에 의존하던 전통적 기획사 모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스케일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하이브의 다음 행보는 기술과 서사의 결합 위에 놓여 있다. 메타버스, 인공지능 등 신기술은 더 이상 행사용 ‘볼거리’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언어와 문법을 바꾸는 도구로 간주된다. 하이브는 이 영역에서 단순한 동참자가 아니라, 제법 선도적인 실험자의 태도에 가깝다.
![]() [코리안투데이] 뉴진스의 모습(사진제공: pinterest) ⓒ 박찬두 기자 |
가상 공간에서의 콘서트, 현실의 공연장과 연동된 디지털 아바타, 실시간으로 번역되는 다국어 자막 시스템, 팬 개개인의 취향과 시청 패턴을 분석해 맞춤형 콘텐츠를 추천하는 알고리즘 등은 이미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거나 구현을 앞둔 기술들이다. 이 기술들이 결합하면 공연은 물리적 공연장에서의 몇 시간이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를 길게 잇는 시간의 띠가 된다. 콘서트에 가기 전, 팬들은 위버스나 다른 플랫폼에서 아티스트의 콘텐츠를 소비하며 기대를 키우고, 공연 후에는 다시 온라인으로 돌아와 후기를 공유하고, 공식 영상과 팬이 제작한 2차 콘텐츠를 통해 공연을 재방문한다.
K-팝은 오래전부터 ‘팬이 참여하는 서사’를 중시해 왔다. 응원법, 팬송, 팬 영상, 해시태그 캠페인, 생일 서포트, 각종 프로젝트의 기획과 실행에 이르기까지 팬덤의 행위는 서사의 일부가 아니라 서사를 완성하는 주요 동력으로 기능해 왔다. 여기에 메타버스와 AI가 본격적으로 접목되면, 팬은 더 이상 객석에 앉아 공연을 바라보는 ‘관객’에 머물지 않는다. 서사의 진행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서사의 일부를 직접 창작하는 공동 작가로 편입된다.
하이브가 그리는 미래는 단지 더 많은 아티스트를 데뷔시키고 더 많은 공연을 개최해 매출을 키우는 단선적 성장의 도식이 아니다. 콘텐츠, 공연, 플랫폼, 기술을 하나의 생태계로 엮어, K-팝 산업의 패러다임을 다시 짜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공연장은 무대와 객석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거대한 광장이 되고, 플랫폼은 팬덤이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되는 도시이자 기록 보관소가 된다. ‘엔터테인먼트 제국’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풍경을 얻는다.
물론 성장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동반된다. 멀티 레이블 체계는 레이블 간 경쟁과 내부 갈등, 브랜드 정체성의 혼선을 낳을 가능성을 품고 있다. 서로 다른 레이블이 저마다의 색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그룹 간 비교와 팬덤 간 갈등이 증폭될 수 있다. 또한 팬덤의 집중도가 분산되면서, 한 그룹의 상징적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냉정한 평가도 존재한다. 거대한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섬세한 조율과 소통이 요구된다.
글로벌 공연 시장의 ‘빅4’라는 지위 역시 영구히 보장된 족쇄가 아니다. 공연 시장은 경기 침체, 환율 변동, 지정학적 리스크, 팬덤 세대 교체 등 변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스트리밍과 디지털 콘텐츠의 발달로 공연의 의미가 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의 성공은 다음 단계를 향한 자산이 될 수도, 방심을 부르는 달콤한 기억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하이브가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는, 단기 성과에 취하기보다는 산업의 구조를 바꾸려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BTS라는 유례없는 성공을 단지 영광의 전성기 기록으로 보존하는 대신, 멀티 레이블과 플랫폼, 기술 융합이라는 구조적 장치로 번역해낸 점이 이 회사의 가장 두드러진 차별점이다. 이 번역 작업이야말로, 한 시대의 신화를 다음 시대의 시스템으로 옮겨 심는 일이다.
![]() [코리안투데이] 뉴진스의 모습(사진제공: pinterest) ⓒ 박찬두 기자 |
K-팝의 역사는 언제나 몇몇 선구적인 기획사들의 과감한 실험 위에서 확장되어 왔다. 하이브는 이제 그 실험의 무대를 국내에서 글로벌 공연 시장 전체로 넓혔다. 라이브 네이션과 AEG 프레젠츠 같은 이름들 사이에 하이브가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은, K-팝이 더 이상 ‘외부의 손님’이 아니라, 산업 규칙을 함께 설계하는 ‘공동 설계자’가 되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이브는 이미 출발선에서 멀리 벗어났다. 지금 이 회사가 마주한 질문은 ‘포스트 BTS’가 아니라, ‘포스트 K-팝’에 가깝다. K-팝 이후의 K-팝, 다시 말해 장르와 국적의 경계를 넘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의 형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 물음을 향해, 멀티 레이블의 아티스트들이 각자의 무대로 나아가고, 위버스의 팬들이 세계 곳곳에서 반응하며, 메타버스와 AI라는 기술이 뒤에서 미세하게 방향을 고쳐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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