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70년대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호령했던 최고의 미녀배우이자, 당대 최고 톱스타였으며, 시대를 풍미한 명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 씨가 85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영면했다. 최근 건강이 악화된 가운데 지난 7일(현지시간) 오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영화계 관계자들이 전했다.
![]() [코리안 투데이] 김지미 여배우의 전성기 리즈 시절 모습 (사진 제공 = 한국영상자료원(KOFA) 소장 스틸(원본 출처 미상) © 신영민 기자 |
한국 영화 황금기를 빛낸 스타, 김지미 씨가 떠났다. 1957년 스크린에 데뷔한 후 700여 편에 이르는 작품에서 다채로운 연기를 펼치며 수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은 그녀는, 한국 영화사의 전설로 남았다.
『생애와 연기 여정』
1940년 충청남도 대덕(=현재 대전)에서 출생한 김지미 씨는 1957년 영화계에 데뷔했다. 감독 김기영의 작품 ‘황혼열차’를 통해 첫 발을 내디딘 이후, ‘하녀’,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장희빈’, ‘토지’, ‘길소뜸’ 등 시대를 관통하는 대표작들로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쥐며 그야말로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김지미라는 배우의 독보적인 존재감이 이 시기에 확고히 드러났다.
그녀는 서구적이고 화려한 외모와 강렬한 화면 존재감으로 1960~70년대 충무로를 수놓으며, 종종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수식어로 불리기도 했다.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도 확고히 했다.
![]() [코리안 투데이] 김지미 여배우의 전성기 시절 모습 (사진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KOFA) <김지미 회고전> 공식 포스터(2017) )© 신영민 기자 |
『스크린 밖의 역할』
배우로서의 눈부신 활약을 넘어, 김지미 씨는 한국 영화 산업의 성장과 체계화에 직접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제작사 ‘지미필름’을 설립해 총 7편의 작품을 제작하며 제작 현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는 단순한 배우의 영역을 넘어, 한국 영화계가 자생력을 갖춰 나가던 시기에 제작자로서 책임감과 선구적 시도를 감행한 의미 있는 행보였다.
또한 영화 진흥 관련 기구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한국 영화 산업의 제도적 기반과 방향성 마련에도 적극 참여했다. 작품을 통해 관객과 만나는 일만이 아니라, 한국 영화가 더욱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까지 역할을 확장한 것이다.
그 공로는 결국 영화계 전체의 존경으로 이어져, 2010년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지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업적과 헌신이 공식적으로 기려졌다. 이는 배우 김지미를 넘어, 한국 영화사의 한 축을 이끌어 온 선구적 인물로서의 위상을 다시금 확인시킨 순간이었다.
『추모의 물결』
영화인과 팬들은 김지미 씨를 “한국 영화의 전설”, “시대와 감성을 담아낸 배우”로 기억하며 애도의 뜻을 전하고 있다. 그녀의 대표작들은 곧 국내 여러 상영회와 회고전에서 다시 조명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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