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과 일체유심조, 미시세계로 거시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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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안투데이 고흥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

 

이는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화엄경에서 전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마음의 작용일 뿐이며, 현실은 우리의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양자역학과 일체유심조, 미시세계로 거시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가

 [코리안투데이쌍슬릿 실험 다이어그램. 쌍슬릿 실험은 물질의 파동성과 입자성을 확인하는 실험으로 해석된다파동은 회절(回折, diffraction)과 간섭(干涉, Interference)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동시에 미세한 구멍을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하며 회절과 간섭이 작용하여 뒤쪽 스크린에 그 무늬가 나타난다그리고 또한 이 실험은 관측하지 않을 때는 입자가 파동처럼 행동하며 간섭 패턴이 나타나고관측할 때는 입자가 입자처럼 행동하며 슬릿 뒤에 두 줄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보여준다이 실험은 관찰 행위가 입자의 행동(파동성 vs 입자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관찰자가 개입하지 않으면 입자는 여러 상태(중첩 상태)에 존재하지만관찰하는 순간 특정 상태로 고정된다는 것이다.(이미지제공나무위키ⓒ 박찬두

  

흥미롭게도 현대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논의된다. 양자역학의 쌍슬릿 실험(Double-slit experiment)’을 통해 알려진 관측자 효과(observer effect)’는 관측 행위 자체가 입자의 상태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며, 이로 인해 의식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해석이 일부에서 대두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과학적 맥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며, 이를 거시세계에 무리하게 적용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유심조가 말하는 마음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이다.

 

양자역학과 거시세계: 미시세계의 법칙은 어디까지 적용될까?

양자역학이 다루는 세계는 전자, 광자, 기본 입자들이 존재하는 미시세계(微視世界)이다. 이 영역에서는 입자의 상태가 중첩(superposition)되며, 관측하는 순간 특정한 상태로 결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거시세계(巨視世界)에서는 물체가 확정된 위치를 가지며, 자동차는 한 번에 한 곳에서만 존재한다. , 우리의 일상적 현실에서는 양자역학적 불확실성이 적용되지 않는다.

 

일부 해석에서는 관측자가 개입하는 순간 미시세계의 불확정성이 하나의 현실로 고정된다고 주장하며, 이를 확대 해석해 우리의 의식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나 이는 양자역학의 맥락을 벗어난 무리한 해석이다.

 

 [코리안투데이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의 도식.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상자를 열어 관측하기 전까지는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어 있는 고양이가 상자 안에서 중첩된 상태로 공존한다는 것이었고슈뢰딩거는 확률론으로 살아 있는 상태와 죽어 있는 상태라는 상반된 결과가 중첩되어 있다는 말은 궤변이라는 것이다아인슈타인도 슈뢰딩거와는 조금 다른 측면으로 관측을 해야만 비로소 실체가 존재하게 된다는 양자 역학의 개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며, 당신이 달을 보기 전에는 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말을 남겼다.(이미지제공나무위키ⓒ 박찬두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 양자역학의 한계를 드러내다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는 이러한 오해를 지적하기 위해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 한 마리와 방사성 원소, 그리고 방사성 붕괴 여부에 따라 작동하는 독극물 장치를 넣는다.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방사성 원소의 붕괴는 확률적으로 결정되며, 따라서 고양이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고양이가 실제로 동시에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상태일 수는 없다. 이 실험의 핵심은 우리가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확정적으로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의 논리를 거시세계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꼬집었다.

 

, 미시세계에서 성립하는 양자역학의 법칙을 거시세계로 확대 적용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으며, 우리의 일상적 현실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코리안투데이바다를 바라보며 명상하는 모습(사진제공: Mikhail Nilov, 출처: Pexels) ⓒ 박찬두 

 

일체유심조와 관측자 효과: 마음과 현실의 관계

그렇다면, 불교의 일체유심조와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는 같은 개념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관찰이 현실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듯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양자역학에서 관측자 효과는 물리적 측정 행위가 입자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체유심조에서 말하는 마음은 단순한 감각적 인식을 넘어선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세계는 우리의 인식과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같은 현상도 바라보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경험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폭우를 보며 두려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은 같은 폭우를 보며 시원함을 즐긴다. 폭우라는 현상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각자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가 의미하는 바다. 현실은 물리적 실체로서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경험된다.

 

 [코리안투데이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사진제공: Erike Fusiki, 출처: Pexels) ⓒ 박찬두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관찰이 아니라 인식이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측이 단순한 물리적 측정 행위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는 우리 인식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양자역학의 관측자 효과를 확대 해석하여 우리가 현실을 창조한다고 믿는 것은 과학적 맥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우리가 보는 대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인식구조처럼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불교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에서 오랫동안 강조해 온 진리다. 중국의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된 자신을 경험한 후,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라고 질문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상의 존재보다도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실은 불교의 제행무상, 제법무아라는 개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물리학적으로 에너지의 흐름으로 설명되며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대상보다도 인식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코리안투데이파동과 입자가 동시에 나타나는 이미지(이미지제공: 123RF) ⓒ 박찬두

 

양자역학과 불교,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양자역학과 불교철학은 모두 현실의 본질을 탐구하지만, 그 접근 방식과 초점은 다르다.

 

양자역학은 미시세계의 물리적 법칙을 연구하며, 관측이 입자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입증한다. 반면, 불교철학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 실체가 아니라 인식의 산물임을 가르치며, 우리의 마음이 세계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양자역학을 현실을 창조하는 법칙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과학적 오류이며, 반대로 불교의 가르침을 단순한 물리적 현상으로 축소하는 것 또한 부적절하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이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의 현실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같은 현실에서도 어떤 이는 절망을 경험하고, 어떤 이는 희망을 찾는다. 같은 사건 속에서도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깨달음을 얻는다.

 

현실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다. 현실은 우리의 마음이 결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현실을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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