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을 흐르는 한강과 그 옛날 청계천, 그리고 그 주변의 작은 시냇물들은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조선 시대의 한양에서는 청계천이 맑은 물줄기를 자랑하며 붕어, 피라미 같은 물고기들이 노니는 생태의 보고였다. 그 많은 시냇물 중 하나가 바로 북한산에서 시작해 성북동을 거쳐 안암동, 용두동으로 흐르는 안암천(옛 이름 ‘안감내’)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안암천을 안감내라 부르게 된 사연이 있으니 그 사연은 이러하다.
옛날 조선시대에 현재의 안암동에 해당하는 지역은 주로 밭이었다. 개울보다는 지대가 약간 높기는 하였지만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이 가까이 있어 배추나 무, 파나 호련수(시금치) 등 채소를 심으면 농사가 잘되었다.
뿐만 아니라 4대문 안에 사는 양반댁이나 서민들 역시 싱싱한 채소나 푸성귀를 즐겨 찾았으므로 동대문 밖 채소밭은 한양사람들에게는 영양공급처라 할 수 있었다.
순흥 안씨(安氏) 성을 가진 안감(安甘)이라는 총각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채소밭을 가꾸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착하게 살았다.
‘음, 오늘은 왠지 장사가 잘 될 것 같은데 일찌감치 채소를 뽑아다가 문안으로 지고 가야지.’
그동안 채소장사를 오래 하다 보니 장안의 대갓집에 단골도 생겼고 단골집에 가서는 채소만 파는 것이 아니라 장작도 패 주고 그러다 보면 아침밥이나 점심 요기를 돈 안내고 해결하는 수도 가끔 있었다.
더구나 안감이 허우대가 좋은 총각이다 보니 대갓집의 여종들이 호의를 베풀어 다른 채소장사보다는 안감총각에게는 단골고객이 매우 많은 편이었다.
그날 따라 안감은 손에 돈을 좀 만졌다. 며칠동안 계속해서 비가 온 탓으로 장안에 채소 공급이 좀 딸려서 그랬는지 아침 식전에 한 지게 가득히 채소짐을 지고 흥인지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해가 아직 중천에 오르지 않은 이른 아침인데도 채소가 몽땅 팔리고 값도 평소보다 좋아서 안감은 입에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오늘은 오랜만에 복만이네 설렁탕집에 가서 뽀얀 국물에 편육을 썰어 넣은 설렁탕 한 그릇에 막걸리를 한 사발…‘
생각만 해도 회가 동하여 걸음을 빨리하여 복만이네 설렁탕집으로 들어섰다.
현재는 주택가가 되었지만 개울 건너쪽인 용머리 마을 끝에 국왕께서 친히 행차하여 한 해 농사가 잘 되어 백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바라는 제사를 드리는 선농단이 있었다.
임금님께서 제사를 올린 후에 신하들을 데리고 몸소 쟁기질을 하시고 제사에 참여한 신하들이나 구경을 나온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제물로 쓴 소를 잡고 탕국을 끊이고 탕국에 밥을 말아준 국밥을 예전에는 선농단에서 끓인 탕이라 하여 ‘선농탕‘이라 했는데 후에 설롱탕 또는 설렁탕이라 했다.
용머리 마을은 또한 나라에서 쓰는 소나 말을 키우고 훈련하는 목마장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소 시장이 자주 섰고 그래서 설렁탕을 파는 집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복만이네 할머니가 끓이는 설렁탕 맛이 제일이었다.
안감총각이 설렁탕 한 그릇을 사먹기 위해 복만이네 집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식당 안에는 많은 손님들이 자리하고 앉아 맛있게 설렁탕을 들고 있었다.
“저기 노인 양반 잡수시는 데 옆에 빈자리가 하나 있군, 거기 가서 앉게나.”
복만네 할머니가 자리를 권했다.
안감이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옆에서 설렁탕을 먹고 있는 노인을 무심코 바라보니 단저고리 바람의 노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얼마나 음식을 맛있게 먹는지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안감은 배가 부른 듯 하였다.
‘저 연세에 저렇게 음식을 맛있게 잡수시다니! 아무래도 노인께서 너무 시장하셨던 모양이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노인을 자세히 바라보니 노인의 풍모에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이 아무리 봐도 농부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안감이 주문한 설렁탕이 그때 나와서 그 역시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식당 안이 시끄러워졌다. 주인 할머니가 언성을 높여 야단을 치고 있었다.
“남이 장사하는 음식을 먹었으면 당연히 그 값을 치뤄야지. 외상이라니? 수중에 돈이 없으면 먹지를 말든지 아니면 배가 고프니 좀 달라 할 것이지 아무 소리도 안하고 꿀꺽 남의 음식을 먹고서 이제 와서 돈이 없다니 그게 무슨 법이요?“
“주인장 사정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만 깜박하고 돈을 안 가지고 나와서 이리 된 것이요. 내 급히 집에 다녀와서 밥값을 치를 터이니 조금만 봐 주시구려.“
그러나 복만이네 할머니는 목청을 돋구었다.
“아니 내가 언제 영감님을 봤다고 어리석게 밥값 떼일 짓을 한단 말이요? 입고 있는 옷이라도 벗어 놓고 간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옷을 벗어 놓고 갈려니 단저고리만 입었으니 맨몸으로는 나갈 수가 없는 일 아니오? 주인장께서 내 사정을 좀 봐 주시구려.“
“나는 그리는 못 하겠소. 옷을 벗어놓고 갔다 오든지 돈을 내든지 양자택일을 하시오.“
“없는 돈을 내가 어찌 내겠소. 우리 집 하인들이 이 집 설렁탕이 하도 맛있다고 그러기에 내가 돈 생각은 못하고 그냥 들어오다 보니 이런 결례를 하지만 내가 무전취식을 할 사람은 아니오.“
안감이 사태를 보니 여간해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인 할머니, 그 어르신 잡수신 음식값이 얼마요?”
안감이 주인을 불러 물었다.
“채소 장사 총각이 그건 왜 물으오? 대신 돈을 낼 생각은 아닐 텐데?“
“내가 그 어르신 잡수신 음식값을 치러 드리리다.“
안감은 그날 아침 장사로 벌은 돈으로 설렁탕 두 그릇 값을 치른 후에 노인과 함께 그 집을 나왔다.
“총각, 이름이 무엇이고 사는 곳은 어디요? 내가 꼭 총각에게 진 신세를 갚아 드리리다.“
“괜찮습니다. 저도 어르신 연세의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데 연세 많으신 어른께 국밥 한 그릇 대접한 것이 무에 그리 대수로운 일입니까? 오늘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그러지 말고 사는 곳과 이름을 알려 주구려. 사람이 남의 신세를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만 도리가 아니오?“
“저는 오늘 장사가 잘되어 재미도 솔솔하니 더구나 이렇게 좋은 일도 했고. 어르신은 그냥 가십시오.“
“고마운 젊은이야. 그럼 오늘은 이렇게 신세를 지고 내가 갈 테니 언제 시간이 나면 내 집으로 오게나. 종로이니까 혹 채소가 안 팔리거든 몽땅 가지고 오게 내가 팔아줄 터이니까.“
그렇게 하고서 노인과는 헤어졌지만 안감 총각은 그날 하루 기분이 매우 좋았다.
며칠 후,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채소지게를 지고, 온 동네를 외치고 다녀도 채소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단골집도 몇 집 찾아가 사정을 해 보았지만 명절 뒷끝이라 남은 음식이 있어 채소를 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언뜻 종로에 산다는 노인이 생각이 났다.
“그래. 노인께서 헛소리를 하지 않으신 것 같았어. 설마 집을 못 찾으면 헛걸음을 한 셈치면 되니까 종로로 한번 가봐야지.”
안감총각은 노인께서 알려준 그 집으로 찾았다.
아주 으리으리한 기와집, 솟을대문이 있는 커다란 집이었다.
“그 노인께서 이렇게 큰집에서 사시는 분이셨구나! 내가 지금 찾아가면 아는 척이라도 해 주실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그 집 앞에 서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하인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 나와 호통을 쳤다.
“대관절 누구이기에 대감님 댁을 뚫어져라 살피느냐? 어서 가거라.“
오래 있다가는 치도곤을 당할까 겁이 날 정도였다.
안감총각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사정을 말했다.
“저는 동대문 밖 숭인방에서 채소농사를 하여 갖다 파는 장사치인데 어느날…“
그때였다. 하인이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럼 자네가 그 채소장수?!“
“저를 어떻게…?“
“말도 말게. 우리 대감님께서 얼마나 자네를 기다리셨는지. 자네 참으로 잘 왔네. 어서 들어가세나.“
안감은 하인의 안내로 대감집에 들어가 지게를 내놓았다. 대감께서 친히 나와 그를 맞이하고 채소를 다 팔아주고 또한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다.
“사실을 내가 그 날 내 신분을 밝히지 못하였네만 우리가 이리 만났으니 내가 자네 소원 하나쯤은 들어주고 싶네. 소원이 있으면 말을 해보게.”
“…“
“벼슬인가?“
“아닙니다. 저는 못 배웠습니다.“
“그럼 재산인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럼 장가를 들여줄까?“
“언젠가 저에게도 나타나는 참한 처녀가 있겠지요.“
“그러면 뭔가? 그 소원 듣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구먼. 개의치 말고 어서 얘기해 보게. 내가 들어줄 테니.“
“그럼 어르신을 믿고 제 소원을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래. 어서…“
“우리 동네에 냇물이 하나 있는데 비가 오면 물이 불어 그냥 건널 수가 없습니다. 다리를 하나 놓아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채소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저도 좋고, 우리 동네 사람들도 좋고, 우리 어머니도, 동네 노인들도, 아이들도 모두 좋아할 터이고 성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참으로 기특한 청년이로다. 내가 다리를 놓아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부터 그 내 이름을 ‘안감(安甘)내‘라 하고 그 다리이름은 ‘안감내다리‘라 칭하게 할 것이다.”
대감은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후 냇물에는 다리가 놓였다. 이 다리는 총각의 이름을 따 ‘안감내다리’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현재의 안암교로 이어지는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과거 안암천은 단순한 시냇물이 아닌 사람들의 삶을 잇는 다리였고,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비록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그 흔적이 희미해졌지만, 안암천과 안감내다리는 여전히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숨결을 전해준다.
안암천과 안감내 다리에 얽힌 이야기는 단순히 한 마을의 전설이 아니라, 조선 시대 사람들의 정과 공동체의 가치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과거의 삶과 지혜를 배우고, 현재와 미래를 잇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자료제공: 동대문구청 문화관광과 문화예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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