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 박태준은 군인으로, 기업인으로, 정치인으로 권력과 부의 중심을 걸어갔지만, 끝까지 사익을 취하지 않고 조국과 후손만을 생각한 리더였다. 포항제철을 세계 1위 철강사로 일으켜 세우면서도 단 한 주의 주식과 퇴직금조차 가져가지 않았고,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제철소 건설에 연결시킨 결단으로 대한민국 산업화를 견인했다. 일본에 대한 분노는 가슴에 묻고, 배울 것은 배우고 활용하여 극복하는 지일·용일·극일의 자세로 국가적 이익을 앞세웠다.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준 그의 청렴과 헌신은 오늘 세대가 다시 배워야 할 살아 있는 교과서이다.
![]() [코리안투데이] 머릿돌24. 청암 박태준, 한국의 마하트마 간디 © 지승주 기자 |
행동으로 실천한 선비, 청암 박태준.
그는 책상 위에서 정의를 말하던 선비가 아니라, 용광로 앞에서, 전쟁터에서, 협상장 한복판에서 몸으로 지(志)와 의(義)를 실천한 사람이었다.
1927년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여섯 살에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초·중·고를 그곳에서 다녔다. 와세다대 공대 2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며,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임관해 6·25 전쟁 당시에는 경기 포천 지역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1연대의 중대장이었다. 전쟁 속에서 그는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육군대학을 수석 졸업한 뒤 최연소 육사 교무처장, 1군 참모장 등을 지냈다.
이후 그의 이름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34세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대한중석 사장, 포항제철 사장·회장·명예회장, 민정당 대표,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 4선 국회의원,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겉으로만 보면 ‘권력과 부의 중심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린 인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을 가까이 들여다본 이들은 전혀 다른 평가를 남겼다.
소설가 조정래는 그를 가리켜 “한국의 간디”라 부르며 “그 이름 앞에 마하트마, 성스러운 사람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싶다”고 말했다. 전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포항제철을 방문한 뒤 “종업원들이 너나없이 마음으로부터 박태준을 따른다는 사실에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이 말은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그가 어떤 리더였는지 잘 보여준다.
청암의 좌우명은 짧았다.
“짧은 인생을 영원히 조국에.”
이 한마디가 그의 일생을 이끌어간 기둥이었다.
그는 1964년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국영기업 대한중석 사장으로 부임한 지 1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종합제철소를 한 번도 직접 지어본 적 없는 38명의 팀과 함께, 보통 4~5년은 걸린다는 제철소 건설을 3년 3개월 만에 완공했고, 조업 첫 해 포항제철은 매출 1억 달러, 순이익 1,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당시 일본의 동종 기업이 가동 후 50년 가까이 적자를 이어오던 것을 생각하면, 포항제철은 용광로 위에 세운 하나의 기적이었다. 세계 철강사에서 제철소 가동 첫 해부터 흑자를 낸 기업은 포항제철이 유일했다.
이 기적 뒤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라 스스로 먼저 몸을 던진 리더 한 사람이 있었다.
청암은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현장을 24시간 돌아가게 했고, 자신은 하루 3~4시간만 잠을 자며 공사 현장을 챙겼다. 1968년 포항제철 출범부터 1992년 광양제철소 2기 완공까지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포항과 광양의 사택과 현장에서 보냈다. 가족과 함께 살 집 대신 회사 앞 사택을 택했고, 사람들은 그를 두고 “효자동 사택의 주지 스님”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를 진짜 위대하게 만든 것은 탁월한 경영 능력 하나가 아니었다.
그의 리더십 중심에는 ‘무사욕’이 있었다.
포항제철을 창업하고 25년 동안 일한 뒤 물러날 때, 그는 공로주 한 주도 받지 않았고 퇴직금조차 거절했다. 명예회장으로 돌아왔을 때 주변에서 “노후를 생각해 스톡옵션이라도 받으시라”고 권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포항제철은 선조들의 피로 세운 회사다. 공적인 일을 할 때 사욕을 섞지 말라.”
1988년 포항제철이 전체 발행 주식의 10%를 우리사주로 직원 1만9천여 명에게 배정했을 때에도 그는 끝까지 자신의 몫을 챙기지 않았다. 장기간 국영기업 최고경영자로 있으면서 퇴직 후를 대비해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흔한 의심조차 붙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드러난 개인 재산은 거의 없었고, 말년의 생활비와 병원비는 자녀들이 나누어 감당했다. 73세가 되어도 전셋살이를 택했고, 오래 살던 집을 팔아 생긴 돈 중 10억 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다.
어떤 이는 말한다.
“오늘날 같은 세상에 그런 사람이 가능하냐”고.
그러나 청암은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그는 공직과 기업의 자리에서 끊임없는 청탁과 압력, 유혹을 받았다. 1950년대 국방부 인사과장을 맡았을 때에도, 포항제철 사장과 회장으로 있을 때에도, 고가 설비 도입과 원료 계약을 둘러싼 로비는 끊이질 않았다. 그는 그 모든 유혹을 거절했고,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압력이 쏟아질 때에는 아예 그 자리를 내려놓는 길을 선택했다. “청렴결백”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였다.
그의 도덕성은 가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포항제철 사장 시절, 아버지가 “문중 사람들을 좀 써주면 안 되겠냐”고 하자 그는 대답 대신 조용히 방을 나와 회사로 돌아갔다. 인맥과 혈연이 지배하던 시대에, 그는 원칙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청암의 마음을 지탱해준 또 하나의 기둥은 ‘천하위공’이라는 생각이었다.
“천하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다.”
1970년 포항제철에 처음으로 6,000만 원짜리 보험사 리베이트 자금이 들어왔을 때, 그는 이 돈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들고 가 “포항제철 예산에서 뺀 것도 아니고 공돈이니 통치자금에 보태 쓰시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임자 마음대로 쓰라”고 돌려보냈지만, 그는 이 돈을 개인적으로 쓰지 않았다. 오히려 회삿돈을 보태 제철장학회를 만들고, 포항과 광양에 27개의 학교를 세우는 씨앗으로 삼았다. 포항공대를 비롯한 연구 중심 대학과 임직원 자녀 전액 장학 제도는 이런 정신에서 출발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감정에 매이지 않고 현실과 미래를 선택했다.
어릴 적 일본에서 겪었던 차별과 모욕은 결코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수영대회에서 1등을 하고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우승을 빼앗긴 일, 전쟁 말기 폭격이 쏟아지던 도쿄의 방공호에서 할머니들이 “젊은이는 안으로 들어가 책을 펴고 공부하라”며 몸으로 출입구를 막던 장면은 그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그는 일본에 대한 분노는 참았고, 배울 점은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조국 재건을 위한 힘으로 바꾸었다.
포항제철 건설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세계은행과 5개국 8개 회사가 참여한 국제제철차관단은 “한국에 종합제철소는 경제성이 없다”며 모두 손을 뗐다. 한국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됐다. 이때 그는 원래 농림수산업에 쓰기로 되어 있던 대일 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제철 건설에 전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오히라 마사요시 대장상을 설득했다. 일본 정부 간행물을 뒤져 그들이 스스로 조성해 온 산업화 사례를 분석하고, “한국의 제철소는 일본의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정면 승부했다. 완강하던 일본 재무 당국은 결국 그 논리에 마음을 열었다.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 이나야마에게 중국의 덩샤오핑이 “중국에도 포항제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이 한마디는 박태준이라는 사람이 단지 한국 기업인 한 명이 아니라, 아시아 산업사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여준다.
청암이 세운 포항제철은 그의 생전에 품질 경쟁력 세계 1위 철강사가 되었고, 양적으로도 세계 상위권에 올랐다. 포항제철이 없었다면, 한국의 조선·자동차·기계·건설 산업은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업적은 몇 개의 숫자로도, 몇 줄의 문장으로도 다 담을 수 없다.
그러나 그를 정말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화려한 실적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 절망은 없다”, “어떤 분야든 세계 1등이 되자”, “10년 후를 내다보라”는 네 가지 화두를 붙들고 살았다. 이 말들은 지금도 젊은 세대와 리더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능력을 쓰고 있는가.
당신의 성공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당신이 떠난 뒤, 무엇이 남을 것인가.
송복 교수는 그를 이렇게 정리했다.
“책 속에서 정의를 말하는 선비는 많았지만, 현장에서 몸으로 실천한 선비는 드물다. 박태준은 지와 의, 청렴과 사랑을 행동으로 드러낸 ‘현장의 선비’였다.”
돈과 이익이 가치의 기준이 되기 쉬운 시대에,
청암 박태준의 삶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한다.
“천하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
짧은 인생, 조국과 후손을 위해 살라.”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한 시대의 영웅을 추모하는 일을 넘어,
우리 자신의 삶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코리안투데이(The Korean 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