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고관들의 집은 대개 높은 담장과 굳게 닫힌 대문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유 정승의 집은 달랐다. 대문도 담장도 없었기에 누구든지 찾아와 배우고 나눌 수 있었다. 그곳은 학문을 전파하고,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힘을 보탠 열린 공간이었다.
시중을 드는 종을 여럿 거느리고 솟을대문과 높은 담장을 두른 고관댁들과는 달리, 유관 정승의 집에는 대문이나 담장이 없었다. 누구나 그의 집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한양에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온 시골 선비들은 물론, 양반 자제나 젊은 관원들까지도 그의 높은 학문과 경륜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신분과 직급을 따지지 않았다. 그를 찾아온 사람이 양반이든 서민이든 모두에게 열린 태도로 대했다.
“그래, 자네는 내게 무엇을 배우러 찾아왔는고?”
유 정승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부모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찾아온 이들이
“저는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제 조부님은 통훈대부이신 ○○○이십니다”
라고 소개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내 제자가 되고자 청했으니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지. 자네가 누구의 손자이든 그것은 나와 무관하네.”
그의 태도는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다.
학문을 배우려는 열정과 의지에만 귀를 기울였으며, 출신 성분이나 집안의 높낮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 정승은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집을 찾아와 배우기를 청했다.
유 정승은 가난한 이웃이나 친척들을 돕는 데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공동체를 위한 일이라면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어느 날 한 마을 사람이 찾아와 하소연했다.
“저희 마을에 개울이 있어 큰물이 지면 통행이 불편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리를 놓으려 하지만 경비가 부족합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 정승은 말했다.
“그런 일은 나라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러나 백성들이 스스로 나선다니 얼마나 기특한가? 나도 조금 보태야겠네.”
그는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내놓았다.
또 다른 이가 찾아와 말했다.
“저희 선대 6대조께서 한성판윤(서울 시장)을 지내셨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셨습니다. 그 어른의 사당을 고향에 세우고 싶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도움을 청합니다.”
유 정승은 뿌리를 찾고 조상을 기리는 것이 좋은 일이라며 선뜻 보탬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그의 도움은 사사로운 청탁을 넘어, 공동체의 발전과 개인의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유 정승의 집은 대문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집에는 더 큰 문이 존재했다. 바로 출신과 신분의 벽을 허물고 학문을 전파하려는 열린 마음이었다. 또한 그는 실천하는 리더였다. 가난한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아낌없이 나누며 자신이 가진 지식과 재물을 세상과 함께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배워야 할 점이 많다. 편견과 차별 없이 기회를 제공하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정신은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이다. 유 정승의 삶과 정신은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자료 제공 : 동대문구청 문화관광과 문화예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