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전다리, 옛 한양의 길목에서 피어난 떡장수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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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가 위치한 전농동에서 청량리 방향으로 넘어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떡전교또는 떡전다리라 불리는데, 과거 이곳에 떡을 만들어 파는 떡집이 많아 떡점(餠店) 거리또는 떡전거리라고 불리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떡전다리, 옛 한양의 길목에서 피어난 떡장수의 지혜
 [코리안투데이지혜로운 창마을 떡장수 이미지(이미지제공동대문구청ⓒ 박찬두 기자

 

현재 중앙선, 경춘선, 경원선이 이 다리 아래를 지나고 있지만, 과거에는 현대적인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 한양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경기 북부, 강원도, 심지어 함경도에서 온 이들은 말을 타거나 걸어서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허기를 달래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잠시 쉬어 가거나, 하룻밤을 묵어가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중앙선 철길이 놓이기 전, 경원선이 개통되고 청량리역이 영업을 시작했을 당시 청량리 일대에는 약 270여 호의 가옥이 있었다.

 

경원선은 용산역에서 출발해 의정부를 거쳐 철원, 석왕사, 원산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었으나, 청량리에서 의정부로 가는 철길이 생긴 이후 용산역보다 청량리역을 이용하는 승객이 많아졌다.

 

 [코리안투데이청량리에서 서울시립대락교 쪽으로 시멘트 다리를 넘어가야 하는데예전에 그 주위에 떡을 만들어 파는 떡집이 많아서 이 다리를 떡전교’ 또는  떡전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 사진은 떡전다리 준공기념비(사진제공네이버 블로그사진으로 보는 민재의 성장일기ⓒ 박찬두 기자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떡전거리에는 여전히 떡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고, 그중에서도 용인댁이라 불리는 떡장수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녀의 손맛은 남달랐고, 덕분에 그녀의 떡은 항상 일찍 팔려나갔다.

 

용인댁은 전농이라 불리는 임금님 소유 논밭이 있는 창마을(현재 전농 4) 배봉산 아래 초가집에서 살았다.

 

봄이면 왕실 소유의 논두렁에서 쑥을 뜯어 쑥떡을 만들고, 배봉산에서 물이 오른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만들어 떡전거리로 나가 팔았다.

 

그녀의 떡은 유난히 맛이 좋아 다른 떡장수들의 떡이 반도 남아 있을 때 그녀는 이미 떡을 모두 팔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은 떡을 만들어 팔면 돈을 더 벌 수 있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광주리에 담아 내 머리에 이고 올 정도면 충분하다.“

 

며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이것만 팔아도 우리 세 식구 끼니 걱정은 없으니까요.“

 

그런 마음씨로 살다간 부자 되기는 틀렸소.“

 

하고 사람들이 비아냥거렸다.

 

내 떡만 팔리면 남의 떡은 언제 팔리나? 같이 떡을 팔아서 벌어먹고 사는데 남 생각도 해야지요.“

 

참으로 마음 씀씀이가 따뜻하고 착한 아주머니였다.

 

그녀의 남편은 몇 해 전에 경원선 철길을 놓는 노동일을 하다가 산에서 큰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다쳐 병석에 누워 있었다.

 

 [코리안투데이] 2025년 배봉산해맞이 행사 홍보 사진(사진제공동대문구청ⓒ 박찬두 기자

 

어느 가을날 그녀는 겨우 네 살 먹은 꼬맹이 아들을 데리고 마을 뒤편에 있는 배봉산에 올랐다.

 

십 리 길에 논이 펼쳐져 있어 답십리라 불렸다는 넓은 벌이 한눈에 들어오고 저만큼 내려다 보이는 전농 논에서는 농부들이 한창 추수를 하고 있었다.

 

저 곡식은 곧 우리 마을 창마을에 있는 왕실 창고에 보관했다가 대궐로 가져가겠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쓰고 상감께서도 저 곡식을 잡수신다 했었지. 우리 그이도 몸만 다치지 않았으면 지금쯤 전농에 나가 일을 하고 쌀이나 보리쌀을 품삯으로 받아 올 텐데…….“

 

곁에 서 있던 네 살짜리 꼬맹이가 혼자서 산을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기겁을 했다.

 

얘야! 거기 섰어. 위험해.“

 

그러나 꼬맹이는 들은 척도 않고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안돼. 그러다가 넘어진다. 엄마 손을 잡고 내려가야지.“

 

그녀는 부리나케 아이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이는 도리질을 했다.

 

아니야. 나 혼자 내려갈 수 있어. 엄마는 내 뒤를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아마도 아이는 엄마 도움 없이도 저 혼자 산을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마로서는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저러다가 만약에 아이가 넘어져서 산에서 굴러 떨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뜩이나 남편마저 몸져누워 있는데 아이까지 다쳐 누워있는 걸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하였다.

그녀는 그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산비탈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엄마 왜 그래? 엄마 다쳤어?“

 

아이가 놀라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그런데 엄마 왜 그래? 왜 안 내려와?“

 

엄만 무서워서 도저히 혼자서는 산을 못 내려갈 것 같구나.“

 

무섭긴 이딴 게 뭐가 무서워?“

 

아이는 엄마 속도 모르고 큰소리를 쳤다.

 

그래도 엄마는 무섭구나. 네가 엄마 손을 잡고 저 밑까지 나를 데려다 주어야 집에 가지, 안 그러면 엄마는 못 갈 것 같구나.“

 

그제서야 아이는 엄마에게로 왔다.

 

엄마, 무서우면 내 손을 잡아. 내가 엄마를 저 밑까지 데려다 줄게.“

 

결국 그렇게 해서 엄마는 아이 손을 잡고 미끄러운 산을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엄마를 도와 산을 내려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지혜로운 어머니가 아이를

 

 [코리안투데이떡전교앞 표지판(사진제공네이버 블로그사진으로 보는 민재의 성장일기ⓒ 박찬두 기자

 

떡전거리는 이제 사라지고, 떡전다리 아래로 전철이 지나는 시대가 되었지만, 옛 한양으로 가던 길목에서 떡을 팔며 살아가던 용인댁의 이야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녀가 보여준 따뜻한 마음과 지혜로운 배려는 떡전거리에서 오가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떡을 나누던 그 마음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듯하다.

 

                                                                                         (자료제공: 문화관광과 문화예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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