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 이후]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만 언제부터 소리가 돌아왔는지, 김희원은 정확히 짚어낼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작업실에 앉아 있었고, 손은 키보드 위에 놓인 채였다. 패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이전과 다르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전의 침묵이 계산 대기 상태였다면, 지금의 침묵은 판단을 유보한 상태에 가까웠다.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으나, 그 작동 방식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희원은 천천히 호흡을 정리했다. 심박 수는 정상 범위로 돌아왔지만, 손끝의 감각은 둔하지 않았다. 그는 복구를 취소한 시점부터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시간은 예측망이 관리하는 항목 중 하나였고, 지금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판단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순간, 그는 스스로에게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는 오랫동안 판단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
작업실의 잔여 신호는 이전보다 불규칙하게 흐르고 있었다. 미세한 지연, 반복되지 않는 패턴, 설명하기 어려운 간극. 그 흐름은 마치 숨을 고르는 생물처럼 들쭉날쭉했다. 그는 그것을 오류로 분류하지 않았다. 오류는 언제나 시스템의 언어였고, 지금 그가 마주한 것은 언어로 규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현상의 본질처럼 느껴졌다.
[흔들리는 예측]
다음 날 아침, 희원은 다시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 이번에는 7초가 아니었다. 정확한 차이를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하는 순간, 그것이 의미를 갖게 될 것 같았다. 벽면 패널이 켜졌고, 예측 요약이 떠올랐다. 사고 확률 0.03퍼센트. 전날과 같았다. 업무 성과 지수 상위 18퍼센트. 역시 같았다. 그러나 마지막 항목에서 미세한 지연이 발생했다. 감정 변동 없음이라는 문장이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
0.4초 뒤, 문장이 출력되었다.
희원은 그 지연을 놓치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민에게는 인식조차 되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예측망은 지연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라는 것을. 지연은 계산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계산 대상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흔들림은 언제나 작은 징후로 시작했다.
도시로 나서는 동안, 그는 이전과 다른 감각을 느꼈다. 사람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질서정연했지만, 그 질서가 완벽하게 맞물리지 않는 순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멈춰야 할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 발걸음, 지나치게 빠른 시선 회피, 이유 없이 길어진 대기 시간. 아주 사소한 어긋남들이었다. 그 어긋남들은 곧바로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설명되지 않은 채 축적되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한 여자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측 요약 패널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신호가 바뀌기 전 한 발 내디뎠다가 다시 멈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 장면을 금세 잊었다. 예측된 하루에 비해 너무 사소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희원만이 그 순간을 기억했다. 예측되지 않은 망설임. 그것은 어제의 자신과 닮아 있었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확대되는 변수]
작업실에 도착하자, 의뢰 목록이 자동으로 갱신되었다. 수량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분류 방식이 바뀌어 있었다. 일부 항목 옆에 미확정이라는 표기가 추가돼 있었다. 희원은 그 단어를 한참 바라보았다. 미확정은 예측망의 공식 어휘에 포함되지 않는 단어였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시스템의 기본 전제였기 때문이다. 그 전제가 처음으로 문서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는 해당 항목 중 하나를 열어보았다. 수치가 불완전하게 표시되었다. 성공 확률은 계산돼 있었지만, 실패 확률이 비어 있었다. 확률의 절반만 존재하는 미래. 공백은 다시 나타났고, 그 공백은 더 이상 하나의 예외처럼 보이지 않았다. 희원은 자신이 만들어낸 파문이 어디까지 퍼지고 있는지 가늠하려 했다. 그러나 파문의 끝은 계산되지 않았다.
그 순간, 박희준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라 직접 호출이었다. 연결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 번째 호출은 무응답으로 끝났고, 두 번째 호출에서는 잡음만 들렸다. 세 번째 시도에서야 화면이 열렸다.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야.”
박희준의 목소리는 낮았고, 주변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는 통제된 공간에 있었다. 통제된 공간에서는 말의 방향도 관리된다.
“아무것도.”
희원은 짧게 대답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그는 복구를 취소했을 뿐, 새로운 코드를 입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취소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제는 자신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시스템이 널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아.”
박희준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예측망 일부에서 이상 반응이 잡히고 있어. 아직은 잡음 수준이지만, 방향이 이상해. 수렴이 아니라 확산 쪽이야.”
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설명은 늘 시스템의 편에 서 있었다. 그는 침묵을 유지했다. 침묵만이 아직 관리되지 않는 영역처럼 느껴졌다.
“윤하린도 움직이고 있어.”
그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통신 상태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신호가 잠시 왜곡되었다가 다시 안정됐다. 희원은 그 흔들림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름 자체가 시스템을 자극하는 키워드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다시 마주친 얼굴]
그날 저녁, 희원은 예측망 센터 근처를 다시 찾았다. 목적은 없었다. 목적 없는 이동은 시스템 권장 사항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무시했다. 센터 앞 광장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사람들은 해가 지기 전 귀가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예측을 따르고 있었다. 광장의 조명은 정해진 밝기로 유지되고 있었고, 그림자조차 계산된 범위 안에 머물렀다.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이서연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임시 통행증은 여전히 목에 걸려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희원은 일정 거리를 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숫자가 아니라 움직임을 보려고 했다. 숨의 리듬, 시선의 방향, 손의 위치 같은 것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불안의 징후도 없었다. 마치 이 장소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앉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단순한 상태가 희원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단순함은 예측망이 가장 싫어하는 조건이었다.
희원은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내일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공백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그 공백이 처음으로 그를 압박했다. 숫자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숫자를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서연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희원의 방향을 스쳐 지나갔다.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희원은 확신했다.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시스템을 보지 않고, 숫자를 거치지 않고. 그 인식은 예상보다 깊게 남았다.
[균열의 확산]
작업실로 돌아온 희원은 예측망의 하위 로그를 다시 열었다. 이전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층위가 열려 있었다. 마치 시스템이 스스로 틈을 만든 것처럼. 그는 그 틈을 따라갔다. 경고 메시지는 없었다. 허가 메시지도 없었다. 그 무대응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데이터는 점점 정돈되지 않은 형태를 띠었다. 예측 경로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고, 일부는 끝을 맺지 못한 채 중단돼 있었다. 미래가 하나의 선이 아니라, 풀리지 않은 매듭처럼 얽혀 있었다. 그는 알았다.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선택이 누적된 결과라는 것을. 한 번의 선택이 다른 선택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아니었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떠올랐다. 책임은 예측망 바깥의 개념이었다. 시스템은 책임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그는 그 바깥에 한 발을 내디뎠고, 발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패널 한쪽에서 새로운 알림이 떠올랐다.
예측 수정 요청.
발신자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내부도, 외부도 아닌 위치에서 온 신호였다.
그날 밤, 희원은 알았다. 예측은 이미 빗나가기 시작했고, 그 시작점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빗나감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있는 범위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