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아이를 다시 키운다면
-다이애나 루먼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 데 관심을 갖지 않고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시를 보았을 것이다. 나도 이 시를 읽고 이렇게 아이를 키워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수많은 부모가 이 시를 읽으며 얼마나 마음을 다잡았겠는가. 내 아이는 행복한 아이로 키우겠다고.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매일 아이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엄마도 아이도 상처로 얼룩져있다. 더구나 함께 있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와 부모는 지쳐간다.
유태인의 격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불행은 전염병이다. 불행한 사람과 병자는 따로 떨어져서 살 필요가 있다. 그 이상 더 병을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서.”
불행은 전염병이라고 했다. 전염병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함께 있는 공간에서, 그 사람이 지나간 곳에서 조차 전염될 수 있다. 그래서 전염병이 있는 사람은 격리하는 것이다. 다 나을 때까지 함께 있으면 안 된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과 말도 하지 말고, 같이 있지도 않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같은 병에 걸리기 때문이 아닌가. 불행도 마찬가지다. 불행한 사람과 같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나도 불행해지는 것 같다. 더이상 마주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같이 있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불행한 부모와 떨어지지도 못하고 할 수 없이 살아야만 하는 아이들은 어떤가. 그 부모의 불행이 그 긴 20년의 세월 동안 그대로 학습된다. 대부분의 아이는 결국 부모와 똑같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 자신의 부모를 탓하며, 자신의 환경을 탓하며 자신의 삶 또한 불행으로 내몰고 간다.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부모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휴. 오늘도 동물의 왕국이네. 동물들끼리 서로 먹고 먹히는 장면이 많아 싫은데.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동물농장이면 모를까.’
날이 좋은 주말이었다. 거실로 나왔는데 하얀 곰의 모습이 보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왕국이나 북극곰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인 줄 알았다. 남편은 평소 동물의 왕국을 즐겨본다. 그러나 나는 동물들의 먹고 먹히는 장면이 보기 싫어 눈을 돌릴 때가 많았다. 제목을 보니 OBS TV의 ‘북극곰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그런 내용인 줄 알고 얼굴을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 곰이 아기곰을 보살피는 장면이 나왔다. 엄마 곰이 아기곰과 함께 북쪽으로 여정을 떠나는 내용이었다.
아기곰들을 데리고 가는 도중 수컷 곰을 만났다. 수컷 곰이 쫓아오자 엄마 곰이 먼저 눈산에 올라가서 아기곰들이 올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꼭대기에서 수컷 곰을 향해 눈을 떨어뜨려 위기를 모면하였다. 지혜롭게 아기곰들을 지켜내는 장면이 너무나 감동이었다. 그렇게 위기를 모면하고 눈으로 덮인 산을 아기곰들을 데리고 내려왔다.
중간중간 너무나도 신나게 미끄럼을 타면서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본 아기곰들이 엄마 곰을 그대로 따라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다. 엄마 곰이 하는 모습을 무엇이든지 그대로 따라했다. 엄마 곰 뒤를 따라 걸을 때도, 수영을 한 후 눈밭에 뒹굴며 털을 말릴 때도, 얼음 위를 걸어갈 때도 엄마가 하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엄마 곰이 사냥을 해서 아기곰들에게 먹였다. 아기곰들이 먹을 동안 주위의 위협으로부터 당당하게 지켜냈다. 곰은 100 킬로미터를 헤엄쳐갈 수 있다고 한다. 헤엄쳐 가는 동안 엄마가 앞에서 길을 헤쳐가며 앞서가면 두 마리의 아기곰들이 한 줄로 엄마의 뒤를 따라 헤엄친다. 물의 저항을 덜 받고 아기곰들이 헤엄칠 수 있는 것이다. 가는 동안 아기곰들이 지치지 않도록 중간 지점에서 쉬도록 좋은 곳을 찾아갔다. 쉬는 동안 아기곰들은 엄마의 품을 파고들었다. 엄마 곰은 자신도 힘들었을텐데 다 내어주었다. 힘들만도 할텐데 엄마 곰의 그 표정이 너무나도 평안했다.
가는 도중 빙산이 무너져 아기곰들이 바다에 빠졌을 때 엄마 곰이 아기곰들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모습은 정말······. 다행히도 아기곰들을 찾았다. 아기곰들을 얼굴로 부비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엄마 곰. 아기곰들을 향한 사랑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엄마만이 할 수 있는 그것이 느껴졌다. 그 엄마 곰의 모습을 보고 배운 아기곰들은 어떤 부모로 자랄까? 아마도 자신의 엄마를 닮아 모성애가 가득하고 지혜로운, 그런 엄마 곰이 되지 않을까 싶다.
동물은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배운다. 사람은 어떨까? 더욱 그렇다. 동물은 이렇게 엄마가 키우다가 좀 성장하면 독립시킨다. 그런데 사람은 보통 20년은 부모의 양육을 받고 자란다. 얼마나 긴 세월인가? 그 세월 동안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다. 부모의 말, 행동, 습관, 사고 방식 등을 모두 그대로 배운다. 부모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아이들의 사고방식은 달라진다. 생활이 달라진다. 인생이 달라진다.
지금 비록 가난하지만 앞으로 꿈을 갖고 실행하며 살면 된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부모에게 닥쳐진 현실로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희망찬 미래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흙수저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성공담들이 많다. 자수성가해서 잘 자란 사람들을 보자. 그들이 어떻게 그 꿈을 이루며 살았는가를 보자. 그들의 성공담에는 공부가 있다.
아이가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이제 엄마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 아이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현실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아이를 위해 부모를 위해 부모 공부를 해야 한다. 몰라서 두렵고 어려운 것이다. 알면 쉽게 할 수 있다. 공부하면 된다. 마음을 먹으면 공부 방법이 보인다. 부모공부는 내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물이다. 지금 당장 내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물을 준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