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엄마아빠 10일차, 옆집 부모에게 휘둘리지 마라

예전에는 부모들의 소통창구가 반 모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톡방이다. 교실이나 학교에 무슨 일이 있으면 부모들의 단톡방은 불이 난다. 그러다 부모들끼리 상처받는 경우도 생긴다. 한 아이에 관해 부모들끼리 이야기하다 보면 그 아이의 부모가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글로 쓰다보니 표현의 차이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

얼굴을 보고 말로 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부풀려지고 큰 일처럼 보여진다. ‘아’가 ‘어’가 되는 경우다. 사람마다 글 쓰는 성향이 다르다. “네”와 “네~”와 “네~^^”의 느낌이 다르다. 글로는 그 마음이 제대로 잘 전달되지 않는다. 단톡방으로 인해 마음에 상처받은 부모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것이 사이버폭력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만 사이버폭력을 가르칠 일이 아니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면 몇 명의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근처 카페나 빵집으로 모인다. 엄마들이 모여서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학급이나 학교, 교육에 관한 정보를 주고 받는다. 특히 저학년 엄마들이 많다. 그런데 여기서 소위 잘나가는 옆집 아이의 엄마에게 휘둘릴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불똥이 내 아이에게 튈 수 있기 때문이다.

워킹맘일 경우 엄마들의 단톡방에서 정보를 얻기도 한다. 엄마들은 자신에게 정보가 없어 내 아이가 불이익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단톡방을 기웃거린다. 엄마들은 옆집 엄마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더구나 옆집 아이가 상을 받거나 잘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더하다. ‘내 아이는 왜 그렇게 안 될까?’, ‘어떻게 하면 그 아이처럼 될 수 있을까?’ 비법이 궁금해진다. 나도 그랬다. 특히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웠다.

“우리 아이가 책을 빨리 읽어요. 하루에도 몇 권씩 읽어요.”
“그래? 아이가 힘들어하지는 않고?”
“네, 잘 다녀요.”
“예전에도 책을 좋아하지 않았니?”
“네, 그런데 속독학원에 가서 배우더니 책을 더 빨리 읽네요.”
“무슨 학원인데?”

후배의 말에 귀가 번쩍했다. 나는 아이들의 독서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교실에서는 아침 자습시간을 독서교육과 창의력을 높이는데 쏟았다.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히려 노력했다. 자기주도학습습관의 기본은 독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배의 아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니 관심이 갔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슬쩍 시켜볼 까 했는데 우리 아이들은 싫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접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조건 빨리 읽는다고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의 아들은 그 방법이 잘 맞아 다행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그 속독학원에 가지 않았어도 둘째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다.

교육과정위원회에서 교내에서 이루어지는 대회를 폐지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최근 학교나 교육기관에서 주관하는 대회가 많이 없어졌다. 좋은 점보다 대회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는 점차 교내대회를 폐지하고 있다. 월말평가, 학년말평가등도 폐지되었다. 하물며 받아쓰기 시험조차 보지 않고 있다. 다만 받아쓰기를 하는 것은 바르게 한글을 가르쳐주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다.

학교는 성취기준 달성을 위해 과정중심평가를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성취해야 할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성취기준에 도달했는지 확인한다. 수행평가나 형성평가가 그런 것이다. 아이가 그 내용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확인하여 교사가 보완해주기 위한 목적이다. 아이들 마다 배움의 속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확인해 주어야 한다. 어떤 과정을 잘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한 학급에 한 두명도 아니고 30명 가까운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을 한꺼번에 지도하려니 그 과정에서 누가 틀리고 누가 맞았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점수에, 받아쓰기에 목숨을 거는 엄마들이 있다. 아이들이 받아쓰기 시험에 100점 맞기를 바라고 늦도록 연습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차라리 아이가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격려하면 아이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공부 잘 하고 싶은 이유를 말해볼까요?”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엄마와 아빠 행복하게 살게 해주려고요.”

저학년이나 고학년이나 아이들에게 “공부를 잘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보았다. 한결같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요.”, “공부 잘해서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어요.” 라고 한다. 그런 아이들이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기준이 눈에 보이는 점수나 등수라는 것이다. 점수나 등수가 아이의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보다 종합적인 학력을 보아야 한다.

학력의 사전적 정의는 ‘교육을 통하여 얻은 지식이나 기술 따위의 능력. 교과 내용을 이해하고 그것을 응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을 이른다.’ 이다. 그러므로 진정 아이들의 성적이 아닌 학력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아이가 관심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그 욕구부터 채워주자. 점수나 등수를 의식하면 과정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사라진다. 스스로 조금씩 좋아하는 분야에 실력을 키워가며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찾아가게 하자.

학교는 각종 대회를 통해 최우수, 우수, 장려를 가려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대회의 대부분은 그리기, 글쓰기, 만들기 등이다. 물론 대회를 통해 아이들이 목표 의식을 갖고 자신이 가진 분야에서 재능을 나타내도록 도와준다. 그러기 위해 대회를 했다. 그렇지만 잘하는 아이는 어느 분야나 잘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리기나 글쓰기 대회를 하면 남자아이보다 여자아이들이 상을 많이 받는다. 발달 특성상 그럴 수 밖에 없다.

대학 입시에서 수시전형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학부모들이 아이의 실적을 쌓기 위해 대회에 목숨을 거는 일들이 많아졌다. 한 줄의 스펙을 넣기 위해 학원으로 전전해야 한다. 대회 시즌이 되면 학원에서 관련 주제로 미리 지도를 받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아이들의 그림과 글은 돋보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생각이 아닌 경우도 있다. 어른들의 생각을 흉내낸 것이다. 아니 강요받은 것이다. 학교에서 각종 대회가 폐지된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비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행복의 최대의 적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평소에는 당당하게 살다가도 옆집 부모가 아이 자랑을 하면 보통의  부모는 작아진다. 그러나 자존감이 있는 행복한 부모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성적을 보지 않고 학력을 본다.

먼저 부모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옆집 부모와 만나 힘을 빼지 말고 그 시간에 부모 자신이 행복한 시간을 갖는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일을 한다. 부모의 행복이 아이에게는 최고의 배움이다. 부모자신이 행복하면 옆집 부모에게 휘둘릴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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