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조선 편] 제14화: 한나라와의 전쟁 – 왕검성 공방전

[역사는 살아있다 – 고조선 편] 제14화: 한나라와의 전쟁 – 왕검성 공방전

“2025년 오늘,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우면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는가.”

기원전 109년 가을, 당대 동아시아 최강대국 한나라의 육군 5만과 수군 7천이 고조선을 향해 진군했다. 2,225년을 이어온 한반도 최초의 국가가 생사의 기로에 섰다.

이것은 단순한 침략 전쟁이 아니었다. 한 무제의 야심, 중계무역의 이권, 흉노와의 동맹 가능성, 그리고 고조선 내부의 균열이 복합적으로 얽힌 동아시아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1년간 지속된 왕검성 공방전, 그 치열했던 최후의 항전을 지금부터 생생하게 복원한다.

시대의 풍경

기원전 2세기 중반, 한 무제 유철(劉徹)은 역사상 가장 야심찬 정복군주 중 한 명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기원전 141년 16세의 나이로 즉위한 그는 53년간 재위하며 한나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

그의 정복 전쟁은 체계적이었다. 북방에서는 기원전 133년부터 흉노를 상대로 43년간 전쟁을 벌여 고비사막 북쪽으로 몰아냈다. 남방에서는 기원전 111년 번우(광동)에 도읍한 남월국을 멸망시켜 9개 군을 설치했다. 서쪽으로는 하서주랑을 탈취해 실크로드로 가는 관문을 확보했다. 이제 남은 것은 동방, 바로 고조선이었다.

“천자가 죄인을 모집하여 조선을 치도록 했다. 그 해 가을에 천자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으로 하여금 제(齊)에서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했다. 군사가 5만명이 되었다. 좌장군 순체(荀彘)에게 요동에서 나아가 우거를 치도록 했다.”

– 출처: 《사기》 조선열전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한 무제 전성기. 흉노를 고비사막 이북으로 격퇴하고 남월을 멸망시켜 9개 군 설치. 인구 6천만의 대제국

🗿 지중해

로마, 카르타고 멸망(BC 146) 이후 지중해 패권 장악. BC 107년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직업군인 탄생

🏺 북방

흉노, 한과의 43년 전쟁으로 쇠퇴 시작. 오르도스와 하서주랑 상실로 경제기반 붕괴

[이미지: 왕검성 포위 공방전 – 한나라 육군과 수군의 양면 공격을 받는 왕검성. 성벽 위에서 고조선 병사들이 활과 창으로 저항하는 모습. 성 아래 한나라 군대의 공성무기와 진영이 둘러싸고 있는 장면]

📜 그날의 현장

“기원전 108년 여름 밤, 왕검성 안은 무더위와 공포로 가득했다. 1년째 계속되는 포위전으로 물과 식량이 바닥나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 망을 보던 병사의 눈에 성 아래 한나라 진영의 모닥불이 보였다. 무수히 많은 불빛이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날 밤, 조용한 골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새벽, 성문이 열렸다. 우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계상 삼이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2,225년 역사가 내부 배신으로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전쟁의 발단은 외교적 모욕이었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 고조선에 복속을 요구했다. 우거왕이 이를 거절하자 섭하는 귀국길에 전송 나온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을 살해하고 도망쳤다. 한 무제는 섭하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요동 동부도위로 임명해 공을 치하했다. 이는 명백한 전쟁 도발이었다.

분노한 고조선은 섭하를 공격해 살해했다. 이를 빌미로 한 무제는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기원전 109년 가을, 누선장군 양복(楊僕)이 해로로, 좌장군 순체(荀彘)가 육로로 왕검성을 향해 진군했다. 총 병력은 육군 5만, 수군 7천. 당시 고조선의 총 동원 가능 병력이 2만 명 전후로 추정되니, 숫자상으로는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그러나 전쟁 초기, 승리의 여신은 고조선 편이었다. 누선장군 양복이 이끈 제나라 출신 병사 7천은 왕검성 앞에서 고조선군의 기습공격에 격파되었다. 양복 본인은 병사를 모두 잃고 10여 일간 산속에 숨어 지내야 했다. 좌장군 순체의 본진도 패수(浿水)에서 고조선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발이 묶였다. 험준한 지형과 결사항전 의지를 갖춘 고조선군 앞에 한나라의 대군도 무력했다.

시대

BC 109-108년 약 1년간

핵심 인물

우거왕, 한무제, 양복, 순체, 성기, 이계상 삼

병력

한나라 5만7천 vs 고조선 약 2만

결과

고조선 멸망, 한사군 설치

전황이 불리해지자 한 무제는 사신 위산(衛山)을 보내 화의를 제안했다. 우거왕도 장기전의 부담을 느껴 화의에 응했고, 태자를 파견해 사례하기로 했다. 그러나 순체와 위산이 태자의 호위군 1만에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의심을 품은 태자가 패수를 건너지 않고 돌아가버렸다. 화의는 결렬되었고 전쟁은 재개되었다.

한 무제는 공손수를 현장에 파견해 상황을 수습하게 했다. 순체는 양복이 고조선과 내통하고 있다며 그를 체포했고, 공손수가 이를 승인하면서 양복의 군대는 순체 휘하로 통합되었다. 군대를 일원화한 순체는 왕검성을 맹렬히 공격했다. 수개월에 걸친 포위 공성전이 계속되었지만 왕검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3중 성벽 구조와 결사항전 의지가 만들어낸 철옹성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조선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위만조선은 토착 고조선인과 중국계 유민 세력의 연합 정권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이 구조적 모순이 드러났다. 조선상 역계경(歷谿卿)은 화친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2천여 호를 이끌고 남쪽 진국으로 떠났다.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장군 왕겹 등도 왕검성을 빠져나와 한나라에 항복했다.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왕검성은 현재의 평양 일대로 보는 것이 정설. 고조선은 내부 분열로 멸망했으며 한나라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모든 장군이 처벌받음

대안적 견해

일부 학자는 왕검성을 요동 지역으로 비정. 위만조선의 멸망이 곧 고조선 전체의 멸망은 아니며 남쪽으로 이동한 세력이 계승했다는 주장도 존재

오늘 우리에게 묻다

기원전 108년 여름, 이계상 삼은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했다. 주화파였던 그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왕을 죽이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것은 배신인가, 아니면 현실적 판단인가.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우거왕이 죽은 후에도 대신 성기(成己)는 끝까지 항전했다. 그는 왕검성 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며 저항을 계속했다. 결국 그도 우거왕의 아들 장항과 노인의 아들 최에게 암살당했지만, 그의 마지막 저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25년 오늘, 우리는 어떤 가치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울 것인가.

구분 고조선 시대 현재
강대국과의 관계 한나라 인구 6천만 vs 고조선 추정 100만. 압도적 국력 차이 주변 강대국 사이 생존 전략. 동맹과 자주성의 균형
내부 분열 토착민-유민 갈등, 주전파-주화파 대립으로 멸망 이념·지역·세대 갈등. 위기 시 통합의 중요성
저항과 협상 초기 승리 후 장기전. 화의 시도 실패와 최후 항전 실리와 명분의 선택. 언제 싸우고 언제 협상할 것인가

[이미지: 현대와의 연결 – 왕검성 유적 추정지(평양 또는 요동)의 현재 모습과 고조선 역사 연구 중인 고고학자들. 과거의 전장이 현재의 평화로운 풍경으로 변한 모습을 대조]

📚 더 깊이 알아보기

  • 한 무제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모든 장군을 처벌했다. 순체는 참수형, 공손수도 처형, 양복은 속전(贖錢)을 내고 서인으로 강등. 한나라가 입은 피해가 막대했음을 보여줌
  • 고조선에 항복한 이계상 삼, 한음, 왕겹 등은 열후에 봉해졌으나 대부분 후에 죄를 얻어 처형당함. 삼은 고조선 포로를 숨긴 죄로 BC 99년 옥사
  • 왕검성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논쟁 중. 평양설이 주류이나 고고학적 증거는 불충분. 요동설, 압록강설 등 다양한 학설 존재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2,225년을 이어온 한반도 최초의 국가는 외부의 침략이 아닌 내부의 분열로 무너졌다. 그러나 성기의 최후 항전은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을 위해,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가. 언제 협상하고 언제 저항해야 하는가.

 

“왕검성이 함락되던 날, 고조선은 끝났지만 그 정신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는 고조선의 후예들, 부여와 고구려의 탄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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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조선 편 (총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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