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순교 163주년, 천주교 신자들의 자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순교 163주년, 천주교 신자들의 자세

최양업 신부 순교 163주년을 맞아, 신자들은 그의 헌신과 신앙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태어난 그는 기해박해로 순교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49년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사목 활동을 펼치며 천주교회를 재건하고 순교자들의 기록을 남겼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과로로 인한 병환을 초래했고, 1861년 문경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코리안투데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 지승주 기자, 출처:나무위키

 

 

최양업 신부는 1821년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여 103위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배교 후 순교하여 2014년에 복자 반열에 올랐다. 최양업의 집안은 루도비코 이존창의 권유로 천주교로 개종한 후 박해를 피해 홍주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

 

1836년, 최양업은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신학을 공부했다. 1839년 아편 문제로 인한 내란을 피해 필리핀으로 피신한 뒤에도 학업을 이어갔다. 1844년에 부제 서품을 받은 후, 상하이로 이동하여 184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홍콩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회계부에서 근무하며 천주교 순교자들의 행적을 번역하는 일을 하던 그는, 1850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127개 공소를 방문하며 1년간 약 2,800km를 걸었고, 하루 32~40km를 걸으며 고해성사를 받고, 이튿날 다시 이동하는 일정을 지속했다.

 

최양업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프랑스 주교와 사제들을 초청하여 조선 천주교회를 재건하였다. 또한, 순교자들의 기록을 수집하여 교황청에 전달함으로써 103위 성인의 시성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헌신적인 활동은 과로로 인한 병환을 유발하였고, 1861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최양업 신부의 묘소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박해 시기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지내던 종교촌으로, 최 신부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현재 이곳은 원주 교구의 배론 성지로 조성되어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순교 163주년을 기념하며, 신자들은 그의 헌신과 신앙을 되새기고 그가 보여준 열정을 본받아야 한다. 최양업 신부가 겪은 고난과 희생을 통해,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 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의 삶은 한국 천주교회의 기초를 다진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며, 그의 업적은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 드라마 압축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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