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은 진정한 청산이 이뤄지지 못한 뼈아픈 과거를 안고 있다. 그 상징적 인물이 바로 ‘고문왕’으로 불린 친일 경찰 노덕술이다. 독립운동가를 잔혹한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는 해방 후 처벌은커녕 경찰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의 핵심으로 자리잡는다. 노덕술의 삶은 친일 경찰의 실체와 반민족행위의 연속, 그리고 그를 방조한 시대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 [코리안투데이] 고문으로 독립운동가 숨지게 한 악질 경찰 © 김현수 기자 |
울산에서 태어난 노덕술은 보통학교 중퇴 후 일본인 잡화상 점원으로 일하다 22세에 순사가 되며 일제 경찰 조직에 발을 들인다. 1928년 동래경찰서 경부보로 승진한 그는 신간회 간부 박일형 등을 고문하여 3명을 죽게 만든다. 이어 부산상고 학생들의 항일동맹휴교 사건 배후 인물인 김규직, 유진홍 등을 체포해 고문했으며, 이 중 김규직은 옥사, 유진홍은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 [코리안투데이] 해방 후에도 경찰 요직 꿰찬 친일 세력의 실체 © 김현수 기자 |
이러한 악행으로 ‘독립운동가 색출 전문가’라는 오명을 얻은 그는 혀 잡아당기기, 못 박기, 전기 고문 등 극악한 수법을 일삼았고, 그 공로로 경시로 승진한다. 여론조작과 친일 선전 좌담회를 35회나 주최하며 훈장을 받았고, 해방 당시에는 평양경찰서장으로 있었다.
![]() [코리안투데이] 반민특위 와해시킨 정권과 노덕술의 밀착 관계 © 김현수 기자 |
하지만 해방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군정 시절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복귀하며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선다. 그가 속한 경찰 간부 대부분은 일제 경찰 출신이었고, 독립운동가 출신의 수사국장 최능진은 반대를 이유로 쫓겨난다.
노덕술은 박성근 고문치사 사건으로 문제가 되지만 장택상 청장의 보호 아래 처벌은 피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노덕술을 석방하려 압박하며 반민특위를 흔든다. 끝내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으로 반민특위는 와해되고, 노덕술은 경찰 간부로 복귀한다.
6·25 전쟁 중에는 헌병장교로 변신해 정치공작에 앞장선다. 국회의원 납치 및 개헌 강요 사건의 중심에 선 그는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얻으며 군과 경찰에서 활약한다. 그러나 1955년 미군 물자 유출 사건 연루로 징역 6개월을 받고 파면된다.
이후 1960년 울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1965년 불법 흥신소 운영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69세에 세상을 떠나며 친일과 반민족행위로 점철된 삶을 마감했다.
진보·보수 진영 모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인에 이름을 올린 노덕술은 2014년 울산시 ‘자랑스런 울산인’ 후보로 오르며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는 식민사학 카르텔과 잘못된 역사관을 지닌 공직자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노덕술의 일대기는 단지 한 개인의 악행을 넘어, 국가가 과거를 어떻게 방치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역사다. 다시는 이런 인물과 시대가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 김현수 기자 incheoneast@thekoreantoday.com ]
<저작권자 ⓒ 코리안투데이(The Korean 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