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을 열었다가 바로 닫는다.
잔액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숫자를 확인하는 그 몇 초가 괜히 마음을 건드릴 것 같아서다. 괜히 본 것 같아질까 봐. 이체 버튼 근처까지 갔다가 멈춘다. 오늘은 아닌 것 같아서. 정확히 말하면, 오늘도. 그날은 별일 없는 평일이었다. 뉴스를 보다가 부동산 기사 하나를 스쳤고, 메신저 방에서 누군가의 투자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크게 흥미로운 내용도 아니었다. 그런데 손이 통장으로 갔다.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다. 그냥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숫자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화면을 오래 보지 못했다. 비교가 시작되면 끝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자주 반복된다. 그리고 매번 같은 질문이 남는다. 왜, 이 순간이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 [코리안투데이] 수익비교를 나타내는 이미지 © 현승민 기자 |
비교는 항상 갑작스럽게 시작된다
재무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은 대개 극적이지 않다. 큰 손실도, 충격적인 사건도 없다. 오히려 너무 사소해서 놓치기 쉽다. 남의 숫자를 본 순간, 혹은 남의 속도를 들은 순간이다. 준비되지 않은 비교는 언제나 옆에서 조용히 끼어든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지점에서 멈칫한다. 계획을 세워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다르지 않다. 비교는 계획의 유무를 가리지 않는다. 이미 세워둔 기준 위에 올라와서, 그 기준을 흔든다. 이상한 점은,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불안해진다. 괜히 뒤처진 것 같고, 지금 하는 선택이 틀린 것 같아진다.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감정만 먼저 움직인다.
숫자가 아니라 방향이 흔들린다
사람들은 흔히 재무계획이 무너지는 이유를 숫자에서 찾는다. 수입이 적어서, 자산이 부족해서, 시작이 늦어서. 그런데 현장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은 조금 다르다. 숫자가 아니라 방향이 먼저 흔들린다. 비교는 항상 질문을 바꾼다. ‘이 선택이 내 삶에 맞는가’라는 질문 대신, ‘남들보다 뒤처진 건 아닌가’라는 질문이 들어온다. 질문이 바뀌는 순간, 계획의 성격도 바뀐다. 계획은 삶을 위한 도구였는데, 어느새 순위표가 된다. 그리고 그 순위표에는 끝이 없다. 위를 보면 불안하고, 아래를 보면 애매하다. 어느 쪽에서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현장에서 반복되는 장면 하나
그런 경우가 있었다. 계획을 꽤 성실하게 이어가던 사람이었다. 특별히 공격적인 선택도 없었고, 본인 상황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문제는 계획이 아니라, 주변이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나이의 지인이 더 빠른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큰 성공담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보다 괜찮다”는 말 한마디. 그 말 이후로 계획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존 계획이 갑자기 초라해 보였고, 속도가 느린 것 같았다고 했다. 결국 몇 가지를 동시에 바꾸려 했다. 결과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이후로 계획을 다시 보지 않게 됐다. 계획이 틀려서가 아니라, 믿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
기서 자주 나오는 말이 있다. “관리를 잘해야죠.” 하지만 이 말은 상황을 조금 비켜간다. 관리의 문제가 아니다. 기준의 문제에 가깝다.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관리도 오래 가지 않는다.
‘재무계획은 숫자를 맞추는 일이 아니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기준을 세우는 일에 가깝다.’
기준이 없는 계획은 언제든 외부 자극에 흔들린다. 남의 속도, 남의 선택, 남의 결과가 그대로 내 판단의 재료가 된다. 그러면 계획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반응의 집합이 된다.
비교가 계획을 망치는 방식
비교는 계획을 한 번에 무너뜨리지 않는다. 조금씩 바꾼다. 목표를 바꾸고, 기간을 줄이고, 감당하기 어려운 선택을 끼워 넣는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계획을 수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준이 사라지고 있다. 비교가 반복되면 계획은 점점 설명이 필요해진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남들은 다르게 하는 것 같은데.” 설명이 많아질수록 확신은 줄어든다. 그리고 결국 계획은 서랍 안으로 들어간다. 실패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져서다.
![]() [코리안투데이] 수익률이 비교되는 이미지 © 현승민 기자 |
왜 비교는 이렇게 강한가
요즘 비교는 너무 쉽다. 숫자는 공개되고, 속도는 공유된다. 과정은 생략된 채 결과만 떠다닌다. 이 환경에서 자기 기준을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그래서 많은 계획이 중단된다. 잘못된 선택을 해서가 아니라, 계속 흔들리는 상태를 견디기 어려워서다. 사람은 불안 속에서도 한두 번은 버틸 수 있지만, 매번 흔들리면서 오래 가기는 어렵다.
멈춤
비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교는 의지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남는다. 내가 지금 흔들리는 이유가 숫자 때문인지, 기준 때문인지를 잠시 멈춰서 보는 것. 통장을 다시 열 때, 그 숫자 말고 내가 세워두었던 기준이 아직 남아 있는지.
[ 현승민 기자: ulsangangnam@thekoreantoday.com https://wiago.link/rickymon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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