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각 골’과 하정 유관

  

조선시대 청렴한 선비로 이름난 하정 유관 선생. 그는 청빈한 삶을 실천하며 이웃과 친척을 위해 헌신했다. 자신의 재산은 방 두 칸짜리 초가집뿐이었고, 나라에서 주는 급료 외에는 손에 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철학과 삶은 후세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코리안투데이] ‘우산각 골과 하정 유관 이미지(이미지제공: 동대문구청) 박찬두 기자

 

하정 유관 공은 성품이 워낙 청렴결백하여 부정과는 거리가 멀고, 또한 재물을 탐내지 않다 보니 그가 가진 재산이란 방 2칸짜리 초가집 뿐이었고, 수중에 있는 돈이란 나라에서 주는 급료뿐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웃과 친척들을 돌보아 주다 보니 궁색했고, 심지어는 그를 찾아와 수시로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박정하게 대할 수 없어 조금씩 나누어주다 보니, 그는 항상 가난을 면할 수 없었다.

 

남의 문중에서 사당을 짓겠다고 찾아와도 도와주고 마을에 다리나 서당을 짓는다고 도움을 청하면,

 

교육은 백년지대계라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되고 초석이 될 인재를 기르는 일인데 교육자라 자처하는 내가 어찌 인색할 수 있으리요.”

 

하면서 돈을 나눠 주다 보니 살림은 항상 쪼들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난 선생의 부인 또한 궁색한 살림을 꾸려 가면서도 조금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장맛비가 계속하여 쏟아지는 날이었다. 낡은 초가집이라 장대같이 내리 퍼붓는 장맛비에 그만 지붕이 새기 시작하였다.

  

해마다 추수가 끝난 가을이면 새 볏짚으로 이엉을 이어서 새로이 초가지붕을 얹었지만, 그렇게 하려면 볏짚도 사야 하고 또한 지붕을 잇는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어야 하니, 검소하기 짝이 없는 선생으로서는 그것마저도 낭비라 생각하고 지난가을에 새 지붕을 얹지 않은 탓이었다.

 

 [코리안투데이] 유관 선생이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며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사진제공: 구르미) 박찬두 기자

 

이 방 저 방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처음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세수 그릇을 갖다 놓고 빗물을 받아냈지만, 며칠씩 연속되는 장맛비라 이곳저곳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니 속수무책이었다.

 

부인, 어서 가서 우산을 가져오도록 하시오. 우리 두 사람이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해 보도록 합시다.”

 

부인으로서는 심란하기 짝이 없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감께서 시키는 대로 우산을 가져와 두 내외가 방안에서 비를 피했다.

 

부인, 우리는 그나마 다행이지 않소? 우리에겐 이렇게 비를 피할 우산이라도 준비되어 있으니 말이요.”

 

부인으로서는 듣기가 조금 거북한 말이었지만, 워낙 성품이 그런 분이라 굳이 그 말씀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겐 우산이라도 있지만, 이 장맛비에 우산마저도 없는 백성들이 집에 비가 새면 어찌하나 그게 걱정이구려.”

 

공께서 그리 말씀하시자 부인께서도 그만 불평을 토하고 말았다.

 

비가 새는 방안에서 우산으로 빗물을 받는 일이 어찌 다행한 일이라 말씀하십니까. 우산이 없는 이들은 미리미리 알아서 다른 방도를 썼을 테니 대감께서는 마음을 놓으셔요.”

 

 [코리안투데이] 우산각의 현판 모습(사진제공: 구르미) 박찬두 기자

 

하정 유관 선생의 외손(6대손)으로서 조선시대 실학파의 선구자인 지봉(芝峰) 이수광(李睡光)은 공이 거주하던 옛 집터에 하정 선생을 기리는 정자를 지은 다음, ‘비우당(庇雨堂)’이라는 현판을 달아 공의 덕과 인품을 후세에 전하였으며, 낙산 변두리인 신설동 지역을 우산각 골이라 불렸다.

  

하정 유관 선생의 삶은 청렴과 나눔의 철학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넘어 후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안락함보다 이웃과 공동체의 복지를 우선했던 그의 삶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비우당’과 ‘우산각 골’은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상징일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어져야 할 가치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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