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고인돌의 40%가 한반도에 있다. 약 3만여 기. 이 놀라운 숫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2000년 12월, 호주 케언즈에서 열린 제2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이라는 평가와 함께.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 1,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 사람들은 거대한 돌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80톤이 넘는 돌을 산 위로 옮기고,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동원하고, 정교한 천문학적 배치를 계산한 고조선 사람들. 그들이 남긴 것은 죽음을 넘어선 사회조직력의 증거다.
◆ 시대의 풍경
기원전 1500년 무렵,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민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청동 제련 기술을 습득하면서, 생산력이 급증했고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다. 이는 곧 사유재산과 계급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들이 출현했고, 그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기념물이 필요했다.
고인돌은 바로 그 권력의 상징이었다.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7.1미터, 폭 5.5미터, 높이 2.6미터에 무게 80톤. 화순 대신리의 가장 큰 고인돌은 길이 7.3미터에 무게 약 280톤에 이른다. 고창 죽림리에는 동서로 약 1.8킬로미터에 걸쳐 447기가 밀집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매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배자의 권위를 세우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영국 스톤헨지
BC 3000-2000년 건설. 높이 8미터, 무게 50톤 거석 80개. 환상 열석 구조로 천문 관측 시설로 추정. 하지만 고인돌보다 1,000년 이상 앞서 건설되었다.
🗿 프랑스 카르낙
BC 4500년경 조성. 6킬로미터에 걸친 열석 행렬. 3,000개 이상의 입석이 줄지어 서 있는 장관. 유럽 거석문화의 정점.
🏺 이스터섬 모아이
AD 1250-1500년 제작. 평균 20톤, 최대 90톤의 석상 900여 개. 조상 숭배의 상징. 고인돌보다 무려 2,500년 이상 뒤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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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고창 죽림리 고인돌군 전경 – 산기슭을 따라 1.8km에 걸쳐 늘어선 447기의 고인돌들.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권력과 사회 조직력을 보여주는 장관]
📜 그날의 현장
“기원전 800년 어느 가을날. 화순 대신리 계곡에서 1,000명의 장정이 밧줄을 당긴다. 280톤의 거대한 화강암 덮개돌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통나무 굴림대가 덮개돌 아래를 지나가고, 한 치씩 산 아래로 내려온다.”
“족장이 죽은 지 100일이 지났다. 그의 무덤은 특별해야 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공간. 북극성이 정확히 돌 위에 떠오르도록, 동지점 해가 뜨는 방향으로 정렬되도록. 제사장이 하늘을 보며 손을 들었다. ‘바로 저기다.’ 농한기 동안 공동체 전체가 움직였다. 이것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임을 증명하는 의식이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고인돌 건축은 고도의 공학 기술과 천문학 지식, 그리고 강력한 사회 조직력을 필요로 했다. 영국 학자 호킨스의 연구에 따르면, 70톤 덮개돌 운반에는 1,120명, 50톤 받침돌 운반에 800명, 받침돌 세우기에 200명이 필요했다. 하루에만 최소 2,120명이 동원되어야 했다. 이는 농경 사회에서 엄청난 규모의 노동력 집중이다.
채석 기술 또한 놀랍다. 고창과 화순 유적 주변에서는 채석장이 발견되었는데, 화강암의 절리면을 이용한 쐐기 공법을 사용했다. 암석의 결을 따라 구멍을 파고 나무 쐐기를 박은 후 물을 부어 나무가 팽창하면서 돌을 떼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경사면을 이용해 덮개돌을 굴려 내려보냈다. 채석장에서 고인돌 축조 지점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가깝게 설계되어, 운반의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천문학적 배치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은 북극성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고, 고창 죽림리의 일부 고인돌은 동지점 일출 방향을 가리킨다. 고인돌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제의 공간이자 천문 관측 시설이기도 했다. 농경 사회에서 절기를 아는 것은 생존의 문제였고, 그 지식을 독점한 지배층은 종교적 권위까지 겸비했다. 제정일치 사회의 전형이다.
시대
BC 1500~300년
청동기시대 중기~말기
규모
한반도 약 3만여 기
전 세계의 40% 집중
최대 중량
화순 대신리 280톤
강화 부근리 80톤
UNESCO 등재
2000년 12월
고창·화순·강화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이자 권력의 상징이다. 대형 고인돌은 족장급, 소형은 일반 지배층의 것으로 신분제 사회의 증거다. 농한기 공동 노동력 동원 체계가 확립되어 있었다.
대안적 견해
일부 학자들은 탁자식 고인돌이 제단이나 묘표석 기능도 했다고 주장한다. 무덤방 구조가 없는 경우도 많고, 높은 곳에 배치되어 의례 공간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2000년 UNESCO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 고인돌의 세계적 가치를 공인받은 순간이었다. “밀집도와 다양성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평가. 하지만 이 유산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인가? 80톤 거석을 움직인 3,000년 전 사람들의 협력 정신, 천문학적 지식, 공학 기술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21세기 한국은 반도체와 K-Culture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청동기 시대에 청동 제련 기술로 독자 문화권을 형성했던 고조선인들처럼, 현대 한국인들도 기술 혁신과 문화 창조로 세계 무대에 서 있다. 고인돌이 보여주는 집단의 조직력과 목표 달성 능력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낸 저력의 원류일지도 모른다.
구분 | 고조선 청동기시대 | 현재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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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 채석·운반 공학, 청동 제련, 천문 관측 | 반도체, IT, 조선, 바이오 |
조직력 | 농한기 2,000명 동원, 공동 노동 체계 | 빠른 사회 동원, 국가 프로젝트 집중력 |
문화 | 거석문화의 독자성, 전 세계 40% 집중 | K-Pop, K-Drama 등 문화 한류 확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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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고조선 시대 고창 고인돌 축조 현장과 현대 대한민국의 건설 현장을 대비한 장면. 왼쪽은 약 3천 년 전 청동기 시대 노동자들이 280톤 거석을 밧줄과 통나무로 이동시키는 모습을, 오른쪽은 첨단 기술력으로 초고층 건물을 세우는 현대 엔지니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밧줄이 강철 케이블로 이어지듯, 한국인의 집단적 협력 정신과 기술력의 연속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더 깊이 알아보기
- 2008년 고창 고인돌박물관 개관 – 한국 유일의 고인돌 전문 박물관으로 축조 과정 체험 전시
-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남한 지역 최대 탁자식 고인돌로 사적 제137호 지정
- 화순 유적에서는 채석장과 고인돌이 함께 발견되어 제작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사례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1,000명이 한마음으로 밧줄을 당기던 그날. 280톤의 돌이 움직였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힘이 아니었다. 공동체의 결속, 지도자에 대한 존경, 하늘과 땅을 잇고자 했던 염원. 고인돌에 새겨진 것은 돌이 아니라 사람이다.
“거석은 움직였고, 문명은 꽃피었다. 그리고 3,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돌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함께 무엇을 이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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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조선 편 (총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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