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조선 편] 제4화: 8조법이 말하는 고조선 – 동아시아 최초의 성문법?

[역사는 살아있다 – 고조선 편] 제4화: 8조법이 말하는 고조선 – 동아시아 최초의 성문법?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한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되, 만약 용서를 받고자 하면 50만 전의 돈을 내게 한다.”

기원전 4세기, 함무라비 법전보다 1,400년 늦지만 로마의 12표법보다는 거의 동시대에 등장한 동아시아 최초의 성문법. 중국 『한서(漢書)』 지리지에 단 3개 조항만 전해지는 이 짧은 문장들이 고조선 사회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생명의 가치, 사유재산의 개념, 계급의 존재, 그리고 법치의 시작.

오늘날 대한민국 형법 52조에 여전히 살아있는 자수 감경 조항의 원형이 바로 2,400년 전 고조선에 있었다. 역사는 정말로 살아있다.

시대의 풍경

기원전 4세기의 고조선.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바뀌어가는 전환기, 철기가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대였다.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늘어났고, 이는 필연적으로 빈부 격차와 계급 분화를 가져왔다. 왕 아래 상(相), 대부(大夫), 장군이라는 관직이 정비되고, 일반 백성과 노비라는 신분제가 확립되어 가던 때.

늘어나는 인구와 복잡해지는 사회관계는 더 이상 구전되는 관습법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었다. 중국 문헌에 따르면 이때 고조선에는 ‘팔조지교(八條之敎)’ 또는 ‘범금팔조(犯禁八條)’라 불리는 성문법이 존재했다. 비록 3개 조항만이 전해지지만, 이것만으로도 당시 사회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볼 수 있다.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 《한서(漢書)》 권28하, 지리지(地理志) 8하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전국시대 말기. 법가 사상이 융성하며 상앙의 변법(BC 356)으로 진나라가 부국강병의 길로. 성문법이 체계화되는 시기.

🗿 지중해

로마가 BC 450년 12표법 제정. 그리스는 BC 621년 드라콘의 가혹한 법전 이후 솔론의 개혁으로 민주정 기틀 마련.

🏺 고대 근동

함무라비 법전(BC 1750)은 이미 고대사. 페르시아 제국이 관용 정책으로 광대한 영토 통치 중.

[이미지: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고조선 8조법 원문과 비파형동검, 그리고 함무라비 법전 석비의 비교 이미지]

📜 그날의 현장

“왕검성의 광장. 수천 명의 백성이 모여 있다. 왕의 명을 받은 대부가 나무판에 새겨진 법조문을 크게 읽어 내린다. ‘무릇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군중 속 누군가가 탄식한다. ‘하지만 자수하면 노비가 되어 목숨은 건질 수 있다’는 말에 또 다른 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한 농부가 앞으로 나선다. ‘도둑질한 죄인입니다. 50만 전을 낼 수 없으니 노비가 되겠습니다.’ 그의 가족이 울부짖지만, 법은 엄격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비로웠다.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할 기회를 주었으니.”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고조선의 8조법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 중 하나다. 함무라비 법전(BC 1750)보다는 늦지만, 로마의 12표법(BC 450)과는 거의 동시대이며, 중국 진나라의 법가적 성문법보다는 앞선다. 특히 주목할 점은 8조법이 단순한 형벌 규정이 아니라 체계적인 법치 원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조항인 살인죄는 ‘즉시 사형(當時償殺)’이라는 엄격한 처벌을 규정하면서도, 자수한 경우 노비가 되는 것으로 감형할 수 있었다. 이는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도 회개와 갱생의 기회를 주는 인도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다. 현대 한국 형법 제52조의 자수 감경 규정의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 번째 조항의 ’50만 전’은 논란의 대상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한나라 시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고조선 후기에 이미 명도전 같은 중국 화폐가 유통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를 고려하면, 화폐 경제가 어느 정도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 50만 전은 일반인이 갚기 어려운 거액으로, 사실상 노비가 되는 것을 선택하게 만드는 장치였다.

시대

BC 4세기 이전

전해진 조항

3개/8개

핵심 원칙

생명·재산·신체 보호

영향

한국 법체계의 원형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8조법은 고조선 사회가 이미 성문법 체계를 갖춘 발달된 고대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50만 전 조항은 후대 첨가 가능성이 있으나, 기본 3조는 원형으로 볼 수 있다.

대안적 견해

8조법 자체가 한나라 시대의 시각으로 재구성된 것일 가능성. 실제로는 더 단순한 관습법이었을 수도 있다는 신중론도 존재.

오늘 우리에게 묻다

2,400년 전 고조선의 8조법은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자수하면 형을 감경한다는 원칙은 오늘날 대한민국 형법 제52조에 그대로 살아있다. “죄를 범한 후 수사책임이 있는 관서에 자수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는 조문의 뿌리가 바로 고조선에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8조법이 보여주는 균형 감각이다. 엄격한 처벌과 자비로운 용서, 개인의 생명과 재산권 보호, 피해자 보상과 가해자 처벌의 조화. 이는 단순한 보복법이 아니라 사회 질서와 인간 존엄을 동시에 추구한 법치의 이상을 보여준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는 분명히 다른, 더 진보된 법 정신이었다.

구분 고조선 8조법 현대 한국법
살인죄 즉시 사형 (자수시 노비) 사형·무기·5년 이상 징역 (자수시 감경)
상해죄 곡물로 배상 징역형 + 민사상 손해배상
절도죄 노비 (50만전으로 속죄) 6년 이하 징역 또는 벌금

 [이미지: 현대 대한민국 법원과 고조선 시대 재판 상상도의 비교, 그리고 형법 제52조 자수 감경 조항]

📚 더 깊이 알아보기

  • 나머지 5개 조항은 무엇이었을까? 한서 지리지는 “부인들이 정조를 지켰다”고 기록하여 간음 처벌 조항의 존재를 암시한다.
  • 신라 최치원은 당나라에 보낸 문서에서 ‘팔조지교(八條之敎)’를 계승한다고 명시, 8조법의 전통이 계속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 부여의 4조, 고구려의 법률도 고조선 8조법의 영향을 받아 유사한 구조를 가졌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고조선의 8조법은 단순한 고대의 유물이 아니다. 생명 존중, 사유재산 보호, 인간의 갱생 가능성에 대한 믿음 – 이 모든 가치가 2,400년을 넘어 오늘날 대한민국 법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법은 돌에 새겨지지만, 그 정신은 마음에 새겨진다. 고조선이 새긴 법의 정신은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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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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