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 한 장이 말을 걸어왔다.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인 두 사람, 철조망 사이에서 맞닿는 시선. 제목은 〈여명의 눈동자〉. 그 아래 적힌 문구는 담담하지만 무겁다. “살아남아야만 해. 어떻게든.”
![]() [코리안투데이] 역사는 끝났지만, 생존의 질문은 아직 현재형이다 © 김현수 기자 |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이 작품이 단순한 추억 소환이나 레트로 감성에 기대지 않겠다는 확신을 했다. 광복 80주년. 숫자로는 둥글고 경사스럽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결코 매끈하지 않다. 찢기고 부서지고, 끝내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개인의 생존 기록 위에 오늘이 놓여 있다.
〈여명의 눈동자〉는 늘 거대한 역사 서사의 대표작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이 포스터가 보여주는 건 ‘역사’보다 ‘사람’이다. 이념도, 국가도 아닌 서로의 눈을 붙잡고 버티는 두 존재. 철조망은 시대의 잔혹함을 상징하지만, 그 사이에서 오히려 인간의 체온이 더 선명해진다.
나는 요즘 ‘기억’이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기념일은 많아졌고, 추모 문구는 정제되었지만, 정작 그 시간을 살아낸 개인의 감정은 점점 박제된다. 고통은 교과서 속 문장으로 축약되고, 선택의 갈등은 결과 중심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는 늘 중간에서 흔들린다. 살아야 했고, 살아남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사랑했고 배신했고 후회했다.
뮤지컬이라는 형식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노래는 설명보다 빠르게 감정에 닿고, 무대는 기록되지 않은 표정을 복원한다. 말로는 정리되지 않는 시대의 균열을, 배우의 호흡과 침묵이 대신 증언한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우리가 다시 이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리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보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견뎠는가’를 묻기 위해서.
포스터 속 두 사람은 아직 해방을 맞지 못했다. 그들의 시간은 여전히 밤에 가깝다. 하지만 서로를 올려다보는 그 눈빛에는 분명 여명이 있다.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누군가를 끝내 놓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수많은 행사와 콘텐츠 중에서, 나는 이 작품이 유독 조용하게, 그러나 깊게 다가온다. 축하보다 성찰에 가깝고, 정답보다 질문에 가깝다. 우리는 과연 지금,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는가.
〈여명의 눈동자〉는 묻는다.
살아남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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