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조선 편] 제9화: 연나라와의 대결 – 기원전 4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

[역사는 살아있다 – 고조선 편] 제9화: 연나라와의 대결 – 기원전 4세기 동아시아 국제정세

기원전 323년,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지고, 각국이 스스로 왕을 칭하기 시작한 그 순간, 고조선도 왕을 선포했다.

전국칠웅이 패권을 다투던 그 시대, 고조선은 연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맞섰다. 청동기 문명의 강자 고조선과 철기 문명의 신흥 강국 연나라. 두 나라의 충돌은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과 문명의 대결이었고,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기원전 300년경, 진개라는 한 장군의 침공으로 고조선은 서쪽 영토 2,000리를 잃었다. 요서에서 요동으로 후퇴해야 했던 그날, 고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리고 그 충격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시대의 풍경

기원전 4세기 후반, 중원은 전국칠웅이 패권을 다투던 대혼란의 시대였다.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으로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졌고, 조나라는 호복기사로 기병 전술을 혁신했다. 제나라는 직하학궁을 세워 천하의 인재를 모았고, 초나라는 남방의 대국으로 광활한 영토를 자랑했다. 이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북방 변경의 연나라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기원전 323년,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무너지자 연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고조선도 왕을 선포했다. 위략은 이렇게 기록한다.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 되어 동쪽을 침략하려 하니,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연나라를 공격하여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조선의 대부 예가 간언하자 곧 그만두었고, 대부 예를 시켜 서쪽의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이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이후 조선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연나라는 곧 장군 진개를 보내 조선의 서쪽을 공격해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고,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

– 출처: 《위략》,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인용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 전국칠웅 시대

진나라 상앙의 변법(BC 356년), 조나라 호복기사(BC 307년), 제나라 직하학궁 전성기. 철기 문명과 중앙집권 체제가 본격화되던 대변혁의 시대

🗿 지중해 – 헬레니즘 전야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BC 334-323년)으로 페르시아 제국 멸망.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통일하며 새로운 세계 질서 형성

🏺 인도 – 마우리아 제국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 건설(BC 321년). 알렉산더의 침입 이후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

[이미지: 전국칠웅 시대 지도 – 연나라와 고조선의 위치, BC 4세기 동아시아 정세를 보여주는 역사 지도. 진개의 침공 경로와 만번한의 위치 표시]

📜 그날의 현장

“기원전 300년 가을, 요서 지역 고조선 전초 기지. 동호를 격파한 연나라 장군 진개의 3만 철기병이 국경을 넘어왔다. 고조선 장수가 비파형동검을 뽑아 들었다. 청동의 둔탁한 광택이 석양에 반짝였다.”

“연나라 철기병의 검이 빛났다. 날카롭고 가벼운 철검. 청동검과 부딪치는 순간, 청동이 부러졌다. 고조선군이 무너졌다. 2,000리. 요서에서 요동으로, 고조선은 계속 후퇴했다. 만번한, 천산산맥 서쪽 어딘가에서 전쟁은 멈췄다. 하지만 고조선의 청동기 시대는 그날 끝났다.”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연나라는 전국칠웅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나라였다. 수도는 현재의 베이징 근처인 계였다. 서주시대부터 존재했지만 춘추시대까지는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말, 연소왕이 즉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연소왕은 곽외를 등용하여 개혁을 단행했고, 악의라는 명장을 얻어 군사력을 강화했다.

진개는 바로 이 연소왕 시대의 명장이었다.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진개는 일찍이 동호에 인질로 갔다가 신임을 얻고 돌아와 동호를 기습 공격하여 1,000여 리를 정복했다. 그 후 고조선을 공격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다. 이 전쟁의 시기는 대략 기원전 300년에서 282년 사이로 추정된다. 진개의 손자 진무양이 기원전 227년 형가와 함께 진시황 암살을 시도한 점을 고려하면 이 추정은 합리적이다.

문제는 2,000리의 의미다. 당시 1리는 약 300-400미터로 추정되므로, 2,000리는 대략 600-800km에 해당한다. 고조선이 잃은 땅의 경계인 만번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갈린다. 전통적으로는 평안북도 박천으로 보았으나, 최근 고고학 연구는 요동 천산산맥 일대로 추정한다. 2017년 이후석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전쟁 전후 천산산맥 일대의 물질문화 분포가 급격히 변화했다. 고조선계 세형동검 문화와 연나라 계열 물질문화의 경계가 이동한 것이다.

시대

BC 323년 칭왕
BC 300-282년 진개 침공

핵심 인물

진개(연 장군)
연소왕, 대부 예(고조선)

핵심 사건

2,000리 영토 상실
요서→요동 후퇴

영향

청동→철기 전환
평양 중심 체제로 이동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만번한은 요동 천산산맥 일대. 고조선은 요서 영토를 상실하고 요동-한반도 북부로 세력 범위 축소. 이후 평양으로 중심지 이동

대안적 견해

만번한을 청천강으로 보는 전통 견해도 존재. 일부는 2,000리가 과장이며 실제 영토 상실은 더 적었을 것으로 추정

오늘 우리에게 묻다

기원전 300년의 패배는 단순한 영토 상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의 전환을 강제당한 순간이었다. 청동기 문명의 강자였던 고조선은 철기 문명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고조선은 멸망하지 않았다. 평양으로 중심을 옮기고, 철기 기술을 받아들이며, 세형동검이라는 새로운 청동 무기를 개발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다.

오늘날 한국도 비슷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반도체 패권 전쟁, AI 기술 경쟁, 신냉전 구도 속에서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2,300년 전 고조선이 철기 문명에 적응했듯, 오늘날 우리도 새로운 기술 문명에 적응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현명한 자는 역사에서 배운다.

구분 고조선 시대 (BC 300년) 현재 (2025년)
기술 패권 청동기 vs 철기 문명 충돌 반도체·AI 기술 경쟁
지정학적 위기 전국칠웅 패권 다툼 속 생존 미중 신냉전 구도 속 외교
생존 전략 기술 도입과 체제 혁신 기술 자립과 다변화 외교

[이미지: 현대적 해석 – 비파형동검과 철검의 비교 사진, 또는 고조선 영토 변화를 보여주는 인포그래픽. 요서→요동→평양으로의 중심지 이동 시각화]

📚 더 깊이 알아보기

  • 2000년 중국 랴오닝성 젠창현 둥다장쯔촌에서 청동단검과 연나라 토기가 함께 출토된 적석목곽분 발굴. 진개와 관련된 유물로 추정
  • 진개의 손자 진무양은 형가의 진시황 암살 시도(BC 227년)에 동참했다가 실패하고 살해당함. 이 사건은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에 상세히 기록됨
  • 연나라는 진개의 정복으로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고 5개 군(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을 설치하여 북방을 방어했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기원전 300년 고조선이 2,000리를 잃었을 때, 많은 이들은 고조선의 종말을 예상했다. 하지만 고조선은 살아남았다. 평양으로 중심을 옮기고, 철기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위기는 끝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었다.

 

“역사는 강자가 아니라 적응하는 자의 것이다. 고조선이 그랬고, 오늘날 우리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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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조선 편 (총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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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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