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의 끝자락, 온 가족이 함께 극장에서 마주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순히 500년 전 조선의 비극을 기록한 사극이 아니었다. 장항준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유해진 배우의 깊은 눈빛, 그리고 박지훈 배우가 그려낸 어린 왕의 고독은 스크린을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특히 이 시대의 정치를 이끄는 이들에게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과 아들, 딸의 젖은 눈가는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진리임을 증명한다.
촌장 엄흥도와 단종의 관계는 이 비정한 권력의 세계에서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이다. 세속적이었던 한 남자가 어린 왕과 교감하며 “어찌하여 내가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알게 해준 사람들… 그대와 태산,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다”라는 고백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정치가 회복해야 할 ‘인간 대 인간’의 유대를 보여준다. 정치는 차갑고 냉혹한 숫자가 아니라, 추운 밤 군고구마를 나눠 먹고 서로의 아픔에 물장구치던 소박한 인간미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백성을 통치의 대상이나 표를 얻기 위한 도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시선이야말로 이 시대 정치인들이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덕목이다.
영화 초반, “양반이 우리를 도와준다고요? 그런 양반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며 냉소하던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는 오늘날 정치권을 향한 국민의 불신과 닮아 있다. 하지만 영화는 비극 속에서도 서로의 곁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이제 우리의 정치는 상대방을 궤멸시켜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파괴적인 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과정이 서로를 북돋는 ‘선의의 경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한다.
“기어이 가시려는 겁니까?”라고 묻는 엄흥도의 애처로운 물음 앞에 역사는 이미 정해진 비극의 길을 걸어갔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정치의 목적이 단지 권력의 쟁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실현되지 못한 정의를 기억하고, 소외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사람을 향한 예의가 살아있는 정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가족과 함께 나눈 그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이 시대의 정치인들이 권력의 칼날보다는 사람의 온기를 먼저 살피는 리더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준엄한 가르침이자, 미래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정치의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