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오늘
1926년 8월 13일 금요일, 경성은 늦여름 무더위 속에 있었다. 종로 거리는 여느 아침처럼 전차 종소리와 장사치들의 외침으로 붐볐지만, 서대문형무소 담장 안쪽에는 다른 여름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 6월 10일, 순종의 인산 행렬을 따라 거리로 나섰던 학생들 가운데 아직 풀려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그 어머니와 누이들은 오늘도 형무소 앞을 서성였다.

그날의 경성경성지방법원 둘레는 오늘도 취조를 받으러 오가는 발걸음으로 어수선했다. 지난 6월 10일 순종 인산일에 만세를 외쳤던 중앙고보·연희전문 학생 등 11명은 이미 제령 제7호와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채였다. 재판장 에토(江藤逸夫)의 심문은 여름 내내 이어졌고, 정식 공판은 아직 석 달 가까이 남아 있었다. 학생들은 매일 형무소와 법원을 오가며 조서에 지장을 찍었고, 가족들은 그 뒤를 따라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언론에도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동아일보는 지난 3월, 모스크바 국제농민조합이 3·1절을 기려 보낸 전보문을 실었다가 두 번째 무기정간이라는 중징계를 당한 터였다. 그 뒤로 신문사 안팎에는 ‘이번엔 또 어떤 글이 걸릴까’ 하는 긴장이 가시지 않았다. 실제로 이달 하순에는 1면 칼럼 ‘횡설수설’을 쓴 기자 최원순이 보안법 위반으로,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이 신문지법 위반으로 나란히 기소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조선일보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아 필화(筆禍)를 피하려 붓끝을 조심스레 움직여야 했다. 검열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더위가 편집국을 짓눌렀다.

경성과 한반도경성 밖 소식도 심상치 않았다. 이 해 들어 전국에서 일어난 동맹휴교는 벌써 쉰다섯 건에 이르렀다. 순종의 승하와 6·10 만세운동을 거치며 지방 학교마다 술렁임이 가라앉지 않은 탓이었다. 평안도와 전라도의 여러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고, 총독부 학무국은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바다 건너 상해에서는 안창호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난 5월 말 다시 상해로 건너간 그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한데 모으는 유일당 운동에 앞장섰고, 7월 8일에는 삼일당에서 ‘우리 혁명운동과 임시정부 문제’를 주제로 연설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해 재정난에 빠진 임시정부를 돕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이상촌 건설을 꿈꾸었으나,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날의 세계압록강 너머 중국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의 북벌이 한창이었다. 지난달 초 동원령을 내린 국민혁명군은 후난성을 넘어 후베이성 우한을 향해 북상하고 있었고, 군벌 우페이푸의 군대와 곳곳에서 격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국민당 안에서는 좌우 노선을 둘러싼 갈등도 깊어져, 열흘 전 열린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는 왕징웨이의 복귀 문제가 불거졌다.
영국에서는 지난 5월 총파업이 아흐레 만에 끝났지만,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은 벌써 석 달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임금 삭감에 반발한 광부들은 여전히 갱도 밖에서 버티고 있었고, 정부와 탄광주들은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이날, 동부 일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은행 강도단 두목 리처드 리스 위트모어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성 24시새벽녘, 형무소 담장 밖에는 벌써 몇몇 여인들이 와 있었다. 옥에 갇힌 아들과 남편의 안부를 묻기 위해 첫차를 타고 나온 이들이었다. 면회는 짧았고, 말은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채 끝나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여인들은 매일 같은 자리를 지켰다.
한낮이 되자 더위는 절정에 이르렀다. 우물가에는 빨래하는 아낙들이 모여들었고, 아이들은 그늘을 찾아 골목을 뛰어다녔다. 정동과 안국동 일대 교회에서는 여름 성경학교가 한창이어서, 흰 저고리를 입은 소녀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골목을 오갔다. 저물녘이 되어서야 낮의 열기가 조금 가셨다. 장사치들은 좌판을 거두었고, 저녁밥 짓는 연기가 낮은 지붕 위로 피어올랐다. 형무소 앞을 서성이던 여인들도 그제야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100년의 거울
100년이 흐른 오늘, 그날 형무소 담장 밖에 서 있던 여인들의 자리는 많이 달라졌다. 1926년 조선에서는 학교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여성이 대다수였고, 혼인은 10대 중후반에 이루어지는 일이 흔했다. 옥에 갇힌 가족을 만나는 길은 오직 형무소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항목 | 1926년 경성 | 2026년 서울여성 교육취학률 낮음, 서당·강습소 의존대학 진학률 남성과 대등 이상평균 혼인 연령 | 10대 중후반 | 30대 초반수감자 가족 면회형무소 앞 대면 면회만 가능온라인 접견·변호인 조력권 보장여성 경제활동가사노동 중심경제활동참가율 과반정확한 통계 수치는 시대와 조사 기관마다 차이가 있어 단정하기 어렵지만, 큰 흐름만은 분명하다. 그날 담장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여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변화가, 100년이 지난 오늘의 풍경이다.
![]() 내일, 1926년 8월 14일에는 또 어떤 소식이 경성의 아침을 열게 될까. 무더위는 아직 물러갈 기미가 없지만, 형무소 앞 여인들의 걸음은 내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내일 아침 10시 10분, 다시 만나요. <저작권자 ⓒ 코리안투데이(The Korean 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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