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백제 편
제19화: 무왕과 익산 – 또 하나의 수도
천사백 년 전, 백제의 한 왕은 수도를 옮기려 했다 — 그리고 그 이유는 오늘 우리가 세종시를 만든 이유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금 한국 사회는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이라는 화두를 놓고 씨름한다. 그런데 이 질문 앞에 선 것이 21세기 대한민국만은 아니었다. 7세기 백제, 무왕(재위 600~641)은 사비(오늘날 부여)의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새로운 정치적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출생지로 전해지는 익산 금마 땅에 힘을 쏟았다. 미륵사와 왕궁리,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거대한 유적이 그 흔적이다.
문헌 어디에도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문장은 없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왜 100년 가까이 ‘익산 천도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 시대의 풍경
백제는 4세기 한성(한강 유역)에서 5세기 웅진(공주), 6세기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겨온 나라였다. 무왕이 왕위에 오른 600년은 성왕의 사비 천도(538년) 이후 이미 60여 년이 지난 시점으로, 사비 도성의 귀족 세력, 특히 후대에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불리던 유력 가문들이 왕권을 강하게 견제하던 때였다.
무왕은 즉위 초부터 익산 금마 지역에 눈을 돌렸다. 왕궁리에는 궁성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성벽과 건물터를 조성했고, 그 남쪽 미륵산 자락에는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인 미륵사를 세웠다. 왕궁리 유적에서는 ‘수부(首府, 수도라는 뜻)’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오부명(五部銘) 인장와가 출토되어, 이곳이 단순한 별궁이 아니라 도성급 위상을 지녔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卵乙抱遣去如” —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무왕 즉위 초, 중국은 수(隋)에서 당(唐)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격변기였다. 618년 이연이 당을 건국했고, 백제는 곧 신생 당과도 외교 관계를 맺어야 했다.
🗿 유럽/중동
지구 반대편 비잔틴제국에서는 610년부터 641년까지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 사투를 벌였다. 무왕의 즉위·사망 연대가 헤라클리우스의 재위 시작·종료와 거의 일치하는 것은 흥미로운 우연이다.
🌏 기타 지역
아라비아반도에서는 632년 무함마드가 죽은 뒤 라시둔 칼리프 시대가 열려 이슬람 세력이 급속히 팽창했다. 일본 아스카에서는 스이코 천황과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다.
[이미지: 백제 도성 이동 궤적과 익산의 위치 (4~7세기)]
⚔️ 그날의 현장
“금마 벌판에 아침 안개가 걷히면, 미륵산 자락에 세워지고 있는 거대한 목탑과 석탑의 윤곽이 드러난다. 인부들의 끌 소리가 골짜기를 채우고, 사비에서 온 관리들은 새로 쌓은 궁성 성벽을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멀리서 왕의 행렬이 다가온다. 사비의 유력 가문들 눈을 피해,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백제를 짓고 있었다. 그의 꿈은 세 겹이었다 — 왕권 강화, 신진세력 육성, 그리고 금강 물길을 통한 남방 교역의 장악.”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왕궁리 유적의 발굴은 ‘무왕의 익산 경영’이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실체였음을 보여준다. 후대에 백제 멸망 이후 이 궁성터에 사찰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유적이 크게 파괴되지 않고 지층 속에 남는 역설이 일어났다. 지금 왕궁리 오층석탑이 서 있는 자리 아래에서 궁성의 흔적이 확인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는 학계를 뒤흔들었다. 639년(무왕 재위 40년, 기해년) 서탑에 사리를 봉안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서동설화의 여주인공,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니었다. 이는 서동설화가 사실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라 후대에 재구성된 이야기일 가능성, 혹은 무왕에게 선화공주 외에도 백제 귀족 출신 왕후가 있었을 가능성을 함께 시사한다.
익산에는 무왕과 왕비의 능으로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쌍릉(雙陵)도 자리한다. 단순한 별궁의 땅이라면 왕이 죽어서까지 묻힐 이유는 크지 않다. 백제 왕실은 궁성과 사찰과 왕릉이라는 세 가지 상징을 모두 이 한 곳에 쏟아부은 것이다.
시대
7세기 초중반(600~641)
핵심 인물
무왕(백제 제30대 왕)
핵심 사건
미륵사 창건·왕궁리 궁성 조성
영향
익산, ‘제2의 수도’급 위상 · 2015 유네스코 등재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문헌에 천도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익산 경영은 완전한 수도 이전이 아니라 사비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별도(別都)·이궁(離宮) 경영이었으며, 완성되기 전에 중단됐다는 설이 다수다.
대안적 견해
왕궁리 궁성의 규모, ‘수부’ 명문 기와, 왕릉급 쌍릉의 존재 등을 볼 때 실제 천도가 상당히 진행됐으며, 무왕 말년 혹은 의자왕 즉위 후 사비로 되돌려졌다는 설도 힘을 얻고 있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무왕의 익산 경영은 결국 ‘수도권 집중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의 7세기 버전이었다. 그가 던진 답은 완전한 이전이 아니라 ‘두 번째 중심’을 만드는 것이었다.
21세기 한국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2012년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 전국 곳곳의 혁신도시는 서울 집중을 완화하고 국가 균형발전을 이루기 위한 현대판 ‘익산 경영’이다. 1400년의 시간을 건너, 권력의 중심을 나누려는 시도는 되풀이되고 있다.
| 구분 | 백제 시대 | 현재 |
|---|---|---|
| 정치/안보 | 사비 귀족(대성팔족) 견제, 신진세력 거점 필요 | 서울 수도권 집중 완화, 지방소멸 대응 필요 |
| 군사/외교 | 금강 수로 확보로 남방 교역·방어 거점 강화 | KTX·고속도로망으로 지방 거점도시 연결 |
| 문화/정신 | 미륵신앙, 새로운 불국토를 세우려는 이상 | 지방시대·국가균형발전 비전 |
[이미지: 백제 익산 경영과 현대 균형발전 정책의 비교]
📚 더 깊이 알아보기
-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복원 중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는 무왕과 왕후의 발원문으로, 훗날 국보로 지정됐다.
- 익산 쌍릉은 전통적으로 무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전해지며, 백제 왕릉 가운데 익산에 남은 유일한 사례로 꼽힌다.
-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는 공주·부여의 백제 유적들과 함께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무왕이 익산에 쏟은 30여 년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 꿈이었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했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가 남긴 궁성터와 석탑은 ‘하나의 중심’만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1400년째 증명하고 있다.
“미완의 천도라도, 그 꿈이 남긴 자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 오늘 우리는 어디에 새로운 중심을 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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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편 (총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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