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16화: 당의 재침공 – 끝나지 않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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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안투데이 글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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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고구려 편

제16화: 당의 재침공 – 끝나지 않는 전쟁

전쟁은 한 번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645년 안시성에서 당 태종을 물리쳤어도, 고구려에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안시성 전투의 승리는 통쾌했지만 결정적이지 않았다. 당 태종은 대규모 정면 승부 대신 국경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소모전으로 전략을 바꾸었고, 그가 죽은 뒤에도 아들 고종이 그 전략을 이어받았다. 647년, 648년, 655년, 661년. 14년 동안 반복된 침공은 고구려의 국력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큰 전투에서 이기고도 왜 나라는 점점 지쳐갔을까. 단 한 번의 결전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소모전 앞에서, 국가의 체력은 무엇으로 버텨야 하는가.

◆ 시대의 풍경

645년 안시성 패퇴 이후 당 태종은 전면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소규모 병력을 자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지치게 만드는 ‘이일대로(以逸待勞)’ 전술로 방향을 틀었다. 647년, 우진달(牛進達)과 이적(李勣)의 군대가 요동 남소성·석성 일대를 공격해 곡식을 불태우고 물러갔다. 이듬해 648년 정월에는 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이 3만여 병력과 누선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압록강 하구의 박작성(泊灼城)을 공격했다.

고구려는 오골성·안지성 방면에서 장군 고문(高文)이 3만 병력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당군을 포위했고, 설만철의 군대는 8월 숱한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했다. 649년 당 태종이 대규모 재침공을 준비하던 중 병사하면서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655년 아들 고종이 신라 구원을 명분으로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요하를 건너게 하며 전쟁은 다시 불붙었다. 그리고 661년, 당 고종은 소정방·임아상·방효태·계필하력 등 여섯 갈래 대군을 동원해 평양성까지 밀고 들어왔다.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연개소문이 아들 남생을 보내 정예병 수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여러 군사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 출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9권, 보장왕조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당 태종에서 고종으로 대가 바뀌었지만 고구려 원정 노선은 이어졌다. 651년에는 서돌궐 아사나하로를 정벌하는 등, 당은 동시에 여러 전선을 감당하는 다전선 제국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 유럽/중동

비잔틴 제국은 636년 야르무크 전투 패배 이후 신흥 이슬람 세력에게 시리아·이집트를 잃고 있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651년 멸망했다. 장기전이 제국의 판도를 통째로 바꾸던 시대였다.

🌏 기타 지역

일본은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을 단행하며 당·고구려 전쟁을 지켜보는 관찰자이자 향후 백제 부흥운동에 개입할 잠재적 참전국으로 국력을 정비하고 있었다.

4차에 걸친 당의 침공로 (647-661) 고구려 남소성·석성 647년 박작성 648년 귀단수 655년 평양성 661년 포위 당군 6개 방면군

[이미지: 647년~661년 당나라의 4차례 침공 경로와 주요 격전지]

⚔️ 그날의 현장

“661년 겨울, 대동강 얼음 위로 서리 바람이 몰아친다. 소정방의 군막은 평양성 밖에서 벌써 몇 달째 진을 치고 있지만, 성벽은 요지부동이다. 군량 수레는 오지 않고, 병사들의 짚신은 진작에 닳았다.”

“연개소문은 아들 남생에게 정예 기병을 내주며 압록강 상류를 막게 한다. ‘한 번의 결전이 아니다. 저들이 지쳐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이 전쟁이다.’ 방효태의 옥저도 부대는 결국 사수(蛇水)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방효태 자신도 아들 열세 명과 함께 전사한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647~661년의 전쟁은 안시성 같은 단일 결전이 아니라, 국경을 따라 산발적으로 이어진 소모전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당은 매번 병력 규모와 침공 루트를 바꾸며 고구려가 특정 방어선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647년의 소규모 유격전, 648년의 해상 상륙작전, 655년의 신라 구원을 명분 삼은 기습, 661년의 6개 방면군 총력전까지, 당의 전략은 단계적으로 정교해졌다.

그러나 고구려 역시 매번 격퇴에 성공했다. 오골성의 고문, 신성·안시성 방면의 지역 방어망, 그리고 연개소문 자신이 이끄는 중앙군까지, 삼중의 방어 체계가 작동했다는 것이 요동 일대 산성 유적 조사에서 확인된다. 특히 661년 사수 전투에서 방효태의 옥저도 부대가 궤멸한 것은 당나라의 대규모 원정이 안시성 이후에도 결정적 성과를 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문제는 승리의 대가였다. 매 전투마다 성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장정과 군량은 고스란히 고구려의 생산 기반에서 빠져나갔다. 승리가 쌓일수록 국고는 비어갔고, 젊은 노동력은 전장에서 소모됐다. 645년부터 661년까지 16년간 대소 침공이 최소 다섯 차례, 이는 단순한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제 전체의 지구력 시험이었다.

시대

647년~661년

핵심 인물

연개소문, 연남생, 고문

핵심 사건

사수 전투(661)

영향

국력 소모 누적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연개소문의 대당 강경 노선이 반복된 전쟁을 불러오고 국력 소모를 가속화해, 결과적으로 668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시각이다.

대안적 견해

최근 연구는 당의 침공이 연개소문의 정변과 무관하게 이미 예정된 노선이었으며, 오히려 그의 방어 전략이 668년까지 23년을 더 버티게 한 요인이라 재평가한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전투에서 이기고도 나라가 지치는 구조는 낯설지 않다. 오늘날 장기 분쟁을 겪는 국가들은 승패와 무관하게 국방비 지출, 청년 인력 손실, 산업 기반 훼손이라는 같은 대가를 치른다. 국가의 힘은 단발성 승리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로 판가름 난다.

2022년 이후 이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다. 개별 전투의 승패보다 병참, 경제 제재, 동맹의 지속적 지원 여력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다. 고구려가 안시성에서 이기고도 결국 지쳐간 것처럼, 장기전의 승부는 전장이 아니라 후방의 경제와 사회 체력에서 갈린다.

구분 고구려 시대 현재
정치/안보 신라·백제·당의 다면 압박 속 홀로 버티는 고립전 주변 강대국 사이 균형외교와 동맹 관리
군사/외교 산성 방어망과 지구전으로 대군 소모 첨단 방위산업과 억지력 기반 장기 대비
문화/정신 상무정신과 축성 기술의 결집 K-방산·K-Defense의 세계적 신뢰

국가 체력 게이지 – 반복되는 전쟁의 대가 645년 안시성 직후 648년 박작성 격퇴 이후 655년 귀단수 전투 이후 661년 사수 전투 이후 승리는 반복됐지만 국가 체력은 계속 줄어들었다

[이미지: 반복된 전쟁 승리와 반비례한 고구려 국력 소모 개념도]

📚 더 깊이 알아보기

  • 요동 지역 산성 유적(백암성·박작성 추정지)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는 다중 방어선 구조
  • 방효태가 열세 명의 아들과 함께 사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일화, 당군 지휘부의 손실 규모를 보여준다
  • 《구당서》·《신당서》 고려전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교차 검증을 통한 전쟁 규모 재구성 연구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전쟁에서 이기는 것과 살아남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고구려는 매번 승리했지만, 그 승리의 총합이 곧 국가의 소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시기가 남긴 가장 무거운 교훈이다.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을 지킨 사람들의 시간은 조용히 무너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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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안시성 전투 – 88일간의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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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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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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