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8월 4일 수요일, 경성은 늦여름 더위 속에서 하루를 열었다. 거리는 여느 수요일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몇 시간 앞선 그날 새벽 4시, 대한해협 한복판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선을 뒤흔들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성 사람들은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그날의 경성이날 새벽, 일본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대마도 옆을 지날 무렵이었다. 양장을 입은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갑판에서 서로 껴안고 바다로 몸을 던졌다. 이들은 도쿄 음악학교를 나온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신극 운동을 이끌던 극작가 김우진이었다.
사건은 이날 바로 경성에 알려지지 않았다. 며칠 뒤 동아일보는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라는 제목으로 한 면을 온통 이 소식으로 채웠다. 지난 3일 밤 11시 배가 떠났고, 4일 새벽 대마도 부근에서 사고가 났다고 신문은 전했다. 다만 두 사람을 직접 본 목격자는 없었고, 유서도 남지 않았다. 정사(情死)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신문이 붙인 이름이었다.
경성과 한반도소식이 퍼지자 조선 청년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이 일이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윤심덕이 그해 여름 오사카에서 취입했다는 노래 “사의 찬미”는 뒤늦게 세상에 나와 공전의 반응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신문은 독자들에게 이 사건을 어떻게 볼지 투서를 보내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한편 순종 인산이 끝난 지 두 달, 정동 법원가에서는 그해 6월 만세시위로 붙잡힌 학생들에 대한 취조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의 세계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 멕시코에서는 종교를 강하게 규제하는 이른바 카예스법이 시행에 들어가면서, 과달라하라에서 신자들이 성당을 지키려 무장하고 나서는 등 긴장이 커지고 있었다. 이는 곧 크리스테로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중국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계속해, 후난·후베이 지역에서 군벌 세력을 밀어내며 창사와 우한 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경성 24시 – 유학생과 신극의 밤수요일인 이날, 경성 곳곳의 학교와 강습소에서는 방학 중에도 신학기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오갔다. 조선총독부가 매년 뽑는 관비 유학생 자리는 몇 자리뿐이었고, 윤심덕처럼 도쿄로 건너가 음악이나 문학을 배운 이는 극히 드물었다. 김우진이 몸담았던 토월회 같은 신극 단체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문화의 통로였다. 학교를 나선 학생들은 저녁이면 삼삼오오 모여 새로 나온 노래와 연극 이야기를 나눴다.
100년의 거울항목
1926년
2026년해외 유학 기회관비 유학생 연 수십 명 내외연간 수십만 명 자유 유학여성 예술인의 자리신여성 소수, 스캔들에 취약여성 예술인 활동 전 분야 확대부산-시모노세키 항로관부연락선, 약 8시간 항해고속페리·항공, 3시간대백 년 전 몇 안 되는 유학 자리를 두고 다투던 시절과, 오늘 누구나 배움의 길을 고를 수 있는 시절 사이의 거리는 짧지 않다.
내일을 기다리며내일 1926년 8월 5일, 경성의 신문들은 이 새벽의 일을 앞다투어 지면에 옮기게 된다. 내일 아침 10시 10분,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