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브릿지] 제4권 · 제10장 · 오후 두 시, 화투판과 마작판 사이에서 만난 노년

Photo of author

By 코리안투데이 글로벌

제가 이 원고를 쓰기로 마음먹은 건, 사실 아주 사소한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경로당 문을 열었을 때, 아랫목에 둘러앉아 화투를 치던 어르신들이 저를 보고는 “밥은 먹고 다니냐”며 자리부터 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청두(成都)의 한 골목 기패실에서, 저는 전혀 다른 풍경과 마주했습니다. 마작 패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종업원이 다가와 “몇 시간 하실 거예요?”라고 묻더군요. 같은 오후 2시였는데, 저는 그 순간 두 나라 노년의 ‘쉼’이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청두의 기패실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손주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가 우리 사무실이야”라고 웃으셨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테이블 하나를 시간당 20~30위안에 빌려, 친구들과 위챗으로 “오후 2시에 ○○기패실에서 두 바퀴”라고 약속을 잡고 모이는 곳. 제가 책에 쓴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 노인이 경로당에서 받는 ‘무료 중식’과 중국 노인이 기패실에서 지불하는 ‘시간당 20위안’은 같은 오후 2시를 전혀 다른 경제 행위로 만든다”는 문장이 그 자리에서 떠올랐습니다. 할머니는 그 돈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 돈 내고 노니까 눈치 볼 사람이 없다”고 하셨을 때, 저는 그 말이 참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숫자로 옮겨보면 이 차이는 더 선명해집니다. 2024년 12월 기준 보건복지부 「노인복지시설 현황」에 따르면 한국 전국에는 약 69,260개소의 경로당이 있고, 전국 노인복지시설 96,430개소 가운데 72%를 차지합니다. 운영비와 난방비, 양곡비는 대부분 지방정부 예산에서 나오고, 2024년 5월부터는 주 5일 무료 중식 지원까지 전국으로 확대됐습니다. 반면 중국의 기패실은 산업연구원 报告大厅의 2024년 분석에서 ‘전국 수백만 개소, 시장 규모 1,000억 위안 이상’으로 추정되는 순수 민간 시장입니다. CHARLS(중국 건강·은퇴 종단조사) 2024년 자료를 보면 중국 중·노년의 16.45%가 최근 한 달간 마작·장기·카드 게임에 참여했고, 2002년부터 2018년까지의 장기 패널에서는 그 비율이 23.4~25.7%까지 올라갑니다. 한쪽은 세금이 만든 공간이고, 한쪽은 시장이 만든 공간이라는 사실이 이 숫자들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제가 서울로 돌아와 다시 찾은 경로당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화투를 치던 어르신들 대부분이 같은 동, 같은 단지에 사는 이웃이었고, 복지관에서 나온 강사가 건강체조와 치매예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이용료를 내지 않았고, 그 대신 ‘내 동네 사람들’이라는 소속감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청두의 기패실에서 본 세대 혼합 풍경—손주를 데려온 할아버지, 퇴근 후 합류하는 자녀 세대—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습니다. 저는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놓고서야, ‘휴식 공간’이라는 같은 말이 두 나라에서 얼마나 다른 사회적 계약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됐습니다.

제가 이 만남들에서 계속 곱씹었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노년의 여가를 복지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산업이자 인프라로도 볼 것인가. CHARLS 2024년 분석은 마작·장기 참여가 중·노년의 주관적 행복감, 그리고 인지 기능 개선과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을 보인다고 보고합니다. 기패실이라는 상업 공간이 뜻하지 않게 지역사회의 예방의학 인프라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한국의 경로당이 가진 ‘공공성’과 중국 기패실이 가진 ‘시장의 활력’ 중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기보다, 두 모델이 서로에게 없는 것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각 나라가 노년 인구를 대하는 정책의 결이 다르다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60세 이상 인구가 3억 명을 넘어서면서 민간 여가 공간에 대한 투자가 계속 늘고 있고, 무인 자율 결제와 스마트 마작기를 갖춘 24시간 기패실이 1·2선 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도 여전히 경로당의 디지털화, 즉 예약 시스템이나 건강 IoT 연계 같은 부분에서는 걸음이 더딥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한국 기업들이 눈여겨봐야 할 기회를 봅니다. 거대한 기패실 생태계 위에 스마트 결제나 건강관리 기능을 얹는 방식이든, 반대로 경로당에 디지털 예약과 건강 모니터링을 접목하는 방식이든, 결국 방향은 ‘공공성 위에 기술을 얹는 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혹은 여러분 자신은 노년의 오후를 어떤 공간에서 보내고 싶으신가요. 세금으로 데운 아랫목에서 이웃과 화투를 치는 편안함일까요, 아니면 내 돈을 내고 원하는 시간만큼 원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유일까요. 저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두 모델을 나란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아직 만들지 않은 ‘제3의 공간’이 무엇인지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로당의 온기와 기패실의 활력이 만나는 지점, 그것이 어쩌면 실버 브릿지가 그리고 싶은 다음 풍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디지털 실버」 제10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청두 기패실 취재 당시의 더 많은 인터뷰와, 한국 기업이 참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진입 전략까지 함께 다루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책에서 이어 만나주시면 좋겠습니다. (도서 상세 페이지: 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4-kr/)

📰 기사 원문 보기

<저작권자 ⓒ 코리안투데이(The Korean 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WIA Code — 이 기사 링크
인쇄용 · WIA Code 스캐너로 비추면 인터넷 없이 발행 확인
기사 바로 열기 ·
⇓ PNG 다운로드
WIA Family · 88개 언어 무료 학습 게임 — WIAvers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