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고구려 편
제36화: 평양이냐 국내성이냐, 갈라진 학문의 국경
같은 나라의 역사인데, 남쪽 학자와 북쪽 학자가 그리는 고구려의 지도는 서로 다르다.
분단이 8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하나였던 고구려사 연구도 둘로 갈라졌다. 북한은 지금의 평양·남포 일대에 남은 유적을 발로 딛고 연구하고, 남한은 그 유적 대부분을 사진과 문헌, 그리고 제한된 국제 학술교류를 통해서만 들여다볼 수 있다. 같은 사료를 읽어도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고구려의 얼굴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통일이 된다면, 아니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남과 북의 고구려사 연구는 다시 하나로 만날 수 있을까. 2026년 오늘, 남북 관계가 다시 얼어붙은 이 시점에 이 질문은 더욱 절실하다.
◆ 시대의 풍경
고구려는 도읍을 세 번 옮겼다. 기원전 37년 주몽이 졸본(오녀산성,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환런)에서 나라를 세웠고, 서기 3년 유리왕이 국내성(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427년, 장수왕이 마침내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고구려는 한반도 남진 정책의 새 국면을 열었다. 668년 멸망할 때까지 평양은 고구려 후기 240여 년의 심장이었다.
문제는 오늘이다. 졸본과 국내성은 지금 중국 영토 안에 있고, 평양은 북한 영토다. 남한 학자에게는 세 도읍 모두 직접 발굴하고 답사할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고구려사 연구가 처음부터 국경과 이념의 문제로 시작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십오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十五年 移都平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평양 천도 무렵 중국은 남북조의 분열기였고, 이후 수·당이 통일제국을 이루며 고구려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 유럽/중동
비잔틴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아래 옛 로마 영토 회복을 꾀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비잔틴과 오랜 소모전을 벌였다.
🌏 기타 지역
일본 열도에서는 야마토 정권이 성장하고 있었고, 북방 초원에서는 돌궐이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미지: 졸본·국내성·평양 — 고구려 삼도의 변천과 현재 국경)
⚔️ 그날의 현장
“427년, 국내성을 떠나는 행렬은 며칠이고 끝나지 않았다. 관리와 병사, 장인과 백성이 마차와 우마에 짐을 싣고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새 도읍 평양의 성벽은 아직 흙먼지를 머금은 채였다.”
“그로부터 1,580년 가까이 지난 2006년 겨울, 남과 북의 조사단이 나란히 강서대묘의 널방 안으로 들어섰다. 손전등 빛이 청룡과 백호, 주작과 현무를 차례로 비추자, 남측 연구원은 사진으로만 보던 벽화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분단은 유적 접근권부터 갈라놓았다. 북한은 평양·남포 일대에 남은 강서대묘, 대성산성, 안학궁터 등을 직접 발굴하고 조사할 수 있는 반면, 국내성과 환도산성,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 지안 일대는 지금 중국 지린성 영토여서 남한 학자에게도, 북한 학자에게도 자유로운 현지 조사가 쉽지 않다. 결국 남과 북 모두 자신이 접근 가능한 땅을 중심으로 고구려를 서술해온 셈이다.
1990년대 이후 북한 학계는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대동강문화론’을 내세웠다. 대동강 유역을 세계 5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규정하고,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보다 훨씬 이른 기원전 277년까지 끌어올리는 주장이다. 이는 고구려를 고조선을 계승한 ‘천년강국’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로, 주체사관과 밀접히 맞물려 있다는 것이 남한 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남한 학계는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동북공정에 맞서면서 실증적 접근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2004년 3월 정부는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시켰고, 이는 2006년 9월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흡수통합되어 지금까지 고구려사를 포함한 동북아 역사 왜곡 대응의 중심 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성·환도산성처럼 중국 영토에 있는 유적에 대해서는 중국 학계와의 제한적 학술교류나 위성사진, 현지 발표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시대
고구려 3도읍기(기원전 37~서기 668)
핵심 기관
북: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 남: 동북아역사재단
핵심 사건
2004년 고구려 고분군 유네스코 남북 동시 등재
영향
학문의 분단과 통일 후 재통합 과제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국내외 주류 학계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라 기원전 37년 건국설을 따르며, 고고학 실물 자료와 문헌 사료를 교차 검증하는 실증적 방법을 원칙으로 삼는다.
대안적 견해
북한 학계의 대동강문화론은 건국 연대를 기원전 277년까지 소급하며, 이는 국제 학계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치적 해석이라는 지적이 남한과 서구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된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2006년과 2007년, 남북은 실제로 함께 강서대묘 등 북한 소재 고구려 벽화고분의 보존 상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유적 보존이라는 공동의 목표 앞에서는 협력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학문의 다리가 완전히 끊긴 것이 아니라 잠시 끊겨 있을 뿐이라는 희망을 남긴다.
통일이 이뤄진다면 가장 먼저 다시 이어져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고구려사 연구일 것이다. 평양의 현장 자료와 국제 학계의 실증적 방법론이 만난다면, 지금은 중국 영토가 되어버린 국내성과 환도산성에 대한 남북 공동 연구도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다. 학문의 자유는 정치적 경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완성된다.
| 구분 | 고구려 시대 | 현재 |
|---|---|---|
| 정치/안보 | 삼국과 수·당 사이 세력균형 속 평양 중심 국방 체제 | 분단 속 남북이 각기 다른 고구려사 서술로 정통성을 주장 |
| 군사/외교 |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 요동·한반도 방어선 재편 | 국내성·환도산성은 중국 영토, 학술 접근 자체가 외교 문제화 |
| 문화/정신 | 상무정신과 다원적 천하관, 대외 개방성 | 2004년 남북 동시 유네스코 등재가 보여준 협력의 가능성 |
(이미지: 남북 고구려사 연구기관을 잇는 학술교류의 다리)
📚 더 깊이 알아보기
- 강서대묘 사신도(청룡·백호·주작·현무) —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006~2007년 남북공동 보존조사 대상
- 국내성·환도산성(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 — 광개토대왕릉비와 장군총이 자리한 곳
-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 고분벽화 3D 가상전시관’ — 남한에서 볼 수 있는 대안적 접근 통로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고구려는 하나였지만, 그것을 연구하는 오늘의 우리는 둘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강서대묘의 벽화 앞에 함께 섰던 2006년 겨울의 순간은, 학문이 정치보다 먼저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 고구려는 늘 국경을 넘어 나아갔다. 그 정신은 지금, 갈라진 학문의 국경 앞에서 다시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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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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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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