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선과 사각의 면이 겹쳐진 공간에 어린아이로 보이는 인물이 서 있다. 사진만으로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다만 여러 방향으로 이어지고 꺾이는 선들 사이에 놓인 작은 인물의 모습은 시선을 끈다. 박인주 시인은 이 장면을 ‘길’로 읽었다.
![]() [코리안투데이] 박인주 시인의 「지우개」 © 장시백 기자 |
“길을 찾는다는 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길 찾기는 갈 곳을 정하는 일이다. 시선도 자연스럽게 앞을 향한다. 그런데 다음 세 행에서 방향이 바뀐다.
“지나온 길을하나 둘 지우는일인지도 몰라”
길을 찾는데 왜 지나온 길을 지워야 할까. 이 엇갈림이 「지우개」를 움직이는 축이다. 새로운 방향을 선택하는 순간에는 이미 지나온 선택과 시간이 함께 따라온다. 모두 끌어안고 갈 수는 없다. 어떤 것은 접어 두고, 어떤 것은 더 이상 되짚지 않으며 다음 걸음을 정하게 된다. 시인은 ‘찾는다’와 ‘지운다’를 한데 묶어 길에 대한 익숙한 생각을 틀어 놓는다.
제목 「지우개」도 한몫한다. 지우개는 쓴 흔적을 없애는 물건이다. 이 작품에서는 종이 위 글씨 대신 사람이 지나온 ‘길’에 닿는다. 본문에 지우개라는 사물은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제목을 읽은 뒤에는 “지우는”이라는 동사가 작품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제목과 시구가 서로 맞물리는 방식이 간결하다.
사진과 문장의 거리도 적절하다. 시인은 화면 속 사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진에서 받은 감각을 ‘길’이라는 말로 옮기고, 거기에 ‘지운다’는 뜻을 붙였다. 사진을 보면 시의 문장이 이해되고, 시를 읽은 뒤 사진을 다시 보면 처음 보았던 선과 면이 다른 관계로 다가온다. 디카시에서 사진과 글이 서로 필요한 이유를 이 작품이 잘 말해 준다.
마지막 행 “일인지도 몰라”는 단정하지 않는 말투다. 길을 찾는 일이 반드시 그렇다고 못 박지 않고 하나의 가능성으로 내민다. 그래서 독자는 시인의 결론을 받아 적는 대신 자신의 지나온 길을 대입해 볼 수 있다. 네 행밖에 되지 않는 시가 개인의 경험과 만날 자리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지우개」를 읽고 사진으로 돌아가면 화면은 그대로인데 보는 방향은 달라져 있다. 처음에는 앞으로 이어질 곳을 찾게 하던 선들이, 이제는 이미 지나왔기에 지울 수도 있는 흔적으로 겹쳐진다. 사진이 변한 것이 아니다. 네 행의 시가 보는 사람의 방향을 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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