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화요일 아침, 강화읍 신문리 오일장 어귀에서 순무를 팔고 계신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좌판이라고 해야 접이식 평상 하나에 순무 열댓 단을 쌓아 놓은 것이 전부였고, 그 옆에 세워 둔 종이 박스에는 매직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가 있었습니다. “순무 한 단 오천원”. 제가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여쭙자 할머니는 웃으시며 “글씨가 삐뚤빼뚤하지, 그래도 다들 알아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코리안투데이] 손글씨 가격표 앞에 놓인 순무 좌판 © 장형임 칼럼니스트 |
저는 그 가격표 앞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오천원이라는 숫자 하나가 오늘 아침 몇 시에 순무를 뽑았는지, 밤새 이슬이 얼마나 내렸는지, 옆집 밭에서는 얼마에 내놓았는지까지 다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께 가격을 어떻게 정하시느냐고 여쭤보니, “그냥 그날그날 감으로 하지, 뭐 정해진 게 있나” 하시며 손사래를 치셨습니다. 그 감이라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옆 좌판에서 마늘을 팔던 아주머니가 끼어들며, 요즘은 손주가 가끔 와서 계좌번호를 종이에 크게 적어 붙여 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손님이 물어보는 것은 계좌번호가 아니라 “이거 언제 뽑은 거예요”라는 질문이더랍니다. 신선함을 눈과 손으로 확인하려는 손님들 앞에서, 두 분 다 종이와 손글씨 말고는 달리 쓸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평소 인공지능이라는 것을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이런 자리에서 자꾸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다만 그 생각이 향하는 곳은 거창한 스마트팜이나 자동 판매 시스템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가 오늘 아침에 쓰신 그 손글씨 한 줄, 오천원이라는 숫자와 순무라는 글자,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두는 일부터가 시작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매일 다른 가격표를 사진으로 남겨두면, 언젠가는 그 사진들만으로도 어느 계절에 순무 값이 오르고 내렸는지, 어떤 날씨 뒤에 손님이 많았는지를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거창한 프로그램을 새로 배우실 필요도 없이, 지금 쓰시는 손글씨 그대로, 그 위에 날짜만 한 줄 더 적어 두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인공지능은 그 사진들을 나중에 대신 정리해 주는 역할이면 됩니다.
할머니는 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그런 걸 뭐 하러 해, 내 머릿속에 다 있는데” 하고 웃으셨습니다. 저도 따라 웃었지만, 그 머릿속의 감이 언젠가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할머니의 감을 대신할 수는 없어도, 그 감이 쌓여 온 흔적을 옆에서 조용히 받아 적어 두는 일이라면 인공지능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저는 강화의 농가에서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대단한 예측이나 자동화가 아니라, 이렇게 매일 쌓이는 작은 기록을 대신 챙겨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할머니의 손글씨 가격표 한 장이 십 년 치 모이면 그것대로 귀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손으로 적어 두었다가 그냥 버리는 숫자가 있으신가요, 있다면 그것부터 한번 찍어 모아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저는 좌판을 떠나기 전에 순무 한 단을 샀습니다. 오천원을 건네고 순무를 받아 드는데, 할머니는 다시 종이 박스 쪽으로 몸을 돌려 매직펜을 손에 쥐셨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또 다른 숫자를 적으시겠지요. 그 한 줄 한 줄이 강화의 가을을 기록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기록은 제가 강화에서 쓰고 만든 책과 서비스에도 담겨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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