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판
100년 전 오늘 — 1926년 9월 12일 (일요일)
10:10 – 시계가 미소 짓는 시간, 100년 전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0시 10분의 경성경성에 가을이 내려앉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광화문 네거리 너머로 새 총독부 청사가 마지막 손질을 받고 있었고, 사람들은 낙성식이 열릴 시정기념일(10월 1일)을 열아흐레 앞두고 이 거대한 석조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교회 종소리와 절 종소리가 번갈아 울리는 가운데, 조선 사람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 바로 다음 날 열릴 재판이었다.

그날의 경성본지가 지난 9월 2일과 4일, 6일 연이어 전한 대로, 경복궁 자리에 들어선 조선총독부 새 청사는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10월 1일 시정기념일에 맞춰 낙성식이 예정되어 있었으니, 이날은 꼭 열아흐레가 남은 셈이었다. 하루살이 인부들의 손으로 쌓아올린 벽돌이 이제 거대한 석조 몸체를 이루었고, 정문 앞을 가로막던 광화문은 헐리는 대신 건춘문 쪽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총독부가 애초에 헐어버리려던 광화문을, 조선 사람들은 물론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일본인 학자들까지 나서서 말렸다는 소문이었다. 옮겨질 정확한 시기는 아직 불투명했지만, 적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소식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곤 했다.
같은 시각, 서대문형무소 담장 안에서는 6·10 만세운동으로 잡혀간 중앙고보 학생들이 여전히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 10일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던 그들은, 석 달이 지난 이 일요일에도 아직 형이 정해지지 않은 채 갇혀 있었다. 판결은 두 달 뒤에야 나올 터였다. 일요일이라 종로 상점들은 반나절만 문을 열었고, 정동 거리 교회에서는 아침 예배를 마친 신자들이 삼삼오오 흩어졌다. 그러나 그 평온함 밑으로는 다음 날로 다가온 재판에 대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경성과 한반도이튿날인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는 이른바 제1차·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공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6·10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무너진 화요파 조선공산당 관계자들이 법정에 서는 날이었다. 전국의 눈이 경성으로 쏠려 있었다.
남쪽 끝 목포에서는 다른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본지가 9일자에서 전한 대로, 목포 제유노조 노동자들의 파업은 여러 달째 끝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 쪽의 회유와 경찰의 압박에도 노동자들은 결사대를 조직해 버텼고, 인근 사회단체들이 후원에 나섰다는 소식이 경성까지 전해졌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그해 7월 마련한 새 청사에서 재정난을 딛고 국무위원 체제를 다져가고 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총독부 새 청사의 웅장한 낙성식 준비와, 형무소의 미결수들과, 목포의 지친 파업 노동자들 — 이 세 풍경이 같은 하늘 아래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날의 세계바다 건너 제네바에서는 이틀 뒤인 14일, 로카르노 조약이 정식으로 발효될 예정이었다. 지난 8일 독일이 국제연맹 상임이사국으로 받아들여졌고, 10일에는 독일 외무장관 슈트레제만이 연단에 올라 화해의 연설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국제사회로 돌아오는 이 장면은,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도 짧게나마 실렸다. 미국에서는 쿨리지 대통령이, 영국에서는 볼드윈 총리가 각각 국정을 이끌고 있다는 정도만 외신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졌다. 힘을 잃은 나라가 조약과 외교로 다시 자리를 찾는 모습을,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조선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읽었을까 — 신문은 그 답까지는 적지 않았다.

경성 24시새벽녘 남대문 정거장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장사치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른 아침, 정동과 안국동의 교회들은 예배를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한낮이 되자 종로 거리는 반나절 장사를 마친 상인들과 나들이 나온 가족들로 채워졌다. 해거름 무렵, 청계천변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뛰놀았고, 어른들은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모여 앉아 다음 날 열릴 재판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로 올라가는 총독부 청사의 그림자가 광화문 위로 길게 드리우는 시각이었다. 일요일 하루는 조용히 흘러갔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저마다의 무게가 얹혀 있었다 — 형무소에 갇힌 자식을 둔 부모의 걱정, 목포에서 들려오는 파업 소식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내일이면 다시 시작될 한 주에 대한 막막함이었다.

100년의 거울
100년 전 이 일요일, 힘을 잃었던 독일은 조약 하나로 국제무대에 복귀할 길을 얻었다. 반면 나라를 잃은 조선은 그런 길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 대한민국은 유엔 회원국이자 주요 경제협력체의 일원으로 국제무대 한가운데 서 있다. 확인되지 않은 숫자는 억지로 채우지 않는다.
| 구분 | 1926년 | 2026년국제기구 지위없음 (식민지, 외교권 박탈) | 유엔 회원국, G20 등 주요국 지위경성/서울 인구약 30만 명 (1925년 조사 기준) | 약 900만 명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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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인당 소득 비교확인 안 됨 (식민지 수탈 구조) | 세계 상위권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 100년 전 그 일요일, 재판을 기다리던 학생들과 파업을 이어가던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 내일을 기다리며내일은 13일 월요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조선공산당 사건 공판이 열리는 날이다. 그 법정에서 무슨 말이 오갈지, 본지는 다음 판에서 전한다. 총독부 새 청사의 완공까지는 이제 열여드레가 남았다. 내일 아침 10시 10분, 다시 만나요.<저작권자 ⓒ 코리안투데이(The Korean 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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