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 오후, 강화군 화도면의 한 경로당에서였습니다. 면사무소에서 부탁을 받아 어르신들께 인공지능 이야기를 해 드리기로 한 날이었는데, 준비해 간 영상이 화면에서 한참을 돌다가 멈추고 다시 돌기를 반복했습니다. 저는 노트북 앞에서 괜히 마우스만 만지작거렸고, 맨 앞줄에 앉으신 할머니 한 분이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는 원래 그래요. 비 오는 날은 전화도 잘 안 돼.” 그 한마디에 방 안의 어르신들이 다 같이 웃으셨고, 저는 그제야 노트북을 덮었습니다.
![]() [코리안투데이] 화도면 경로당 창가의 종이 안내문 © 장형임 칼럼니스트 |
노트북을 덮고 나니 제 손에 남은 것은 종이 몇 장과 볼펜 하나였습니다. 저는 인공지능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하려던 생각을 접고, 어르신들께 요즘 무엇이 제일 답답하신지 여쭈었습니다. 병원 예약 전화가 자꾸 기계 목소리로 넘어가서 힘들다는 말씀, 손주가 보내 준 사진이 안 열린다는 말씀, 농협에서 오는 문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다는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그날 저는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순서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을 오래 했습니다. 도시에서 열리는 강연은 대개 기술이 먼저 나오고, 그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뒤따릅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느린 마을에서는 그 순서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화면이 멈추는 순간 기술은 이미 믿음을 잃었고, 그 뒤에 어떤 말을 보태도 어르신들께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며칠 뒤 저는 다시 그 경로당을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영상 대신 종이에 큰 글씨로 병원 예약 전화의 안내 순서를 적어 갔습니다. “1번 누르고, 기다렸다가, 다시 2번.” 할머니께서 그 종이를 냉장고에 붙이겠다고 하셨습니다. 인공지능 이야기는 여전히 꺼내지 않았지만, 그날 저는 처음으로 제가 이 마을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이장님과 마을회관 앞에서 나눈 대화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장님은 “선생님, 우리는 빠른 게 필요한 게 아니라 끊기지 않는 게 필요해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인터넷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곱씹을수록 사람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새로운 것을 하나 들고 와서 한 번 보여 주고 떠나는 사람보다, 느리더라도 다음 주에 또 오는 사람이 이 마을에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순서를 이렇게 바꾸어 보고 있습니다. 먼저 그분들이 지금 겪는 불편을 듣고, 그다음에 손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고, 그것이 익숙해진 뒤에야 “이걸 기계가 대신해 줄 수도 있어요”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입니다. 인공지능은 맨 마지막에 옵니다. 순서가 바뀌었을 뿐인데, 어르신들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저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물론 이 방식은 느립니다. 한 마을에서 한 계절을 보내도 인공지능이라는 말을 제대로 꺼내 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느림이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느린 마을은 사람의 속도를 먼저 가르쳐 주는 곳이었고, 그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기술은 아무리 훌륭해도 그 마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것을 누군가에게 전할 때 어떤 순서로 이야기를 시작하시나요. 기술을 먼저 보여 주시나요, 아니면 그 사람의 하루를 먼저 들으시나요. 혹시 화면이 멈추는 바람에 이야기를 접어야 했던 적이 있다면, 그때 무엇을 먼저 해야 했을지 한 번쯤 떠올려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다음 주에도 그 경로당에 갑니다. 이번에는 노트북을 아예 두고 가려고 합니다. 종이와 볼펜, 그리고 할머니께서 지난번에 물어보신 사진 여는 법을 손으로 적어 갈 생각입니다. 인공지능은 그다음에 천천히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기록은 제가 강화에서 쓰고 만든 책과 서비스에도 담겨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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