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온 인공지능] 제2권 · 제10장 · 딸의 목소리도 흉내 내는 시대, 섬 경로당에서 가족 암호를 정하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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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안투데이 글로벌

지난주 목요일 오후 세 시쯤, 저는 강화 송해면의 한 경로당 마루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밖으로는 누렇게 익어 가는 논이 바람에 한쪽으로 눕고 있었고, 방 안에서는 고구마 찌는 냄새가 은근하게 퍼졌습니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할머니 한 분이 불쑥 제게 물으셨습니다. “딸 목소리로 전화가 오면 그걸 어떻게 가짜라고 의심해요, 내 새끼 목소리인데.” 그 말에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고, 저는 그날 준비해 간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꺼내야 했습니다.

  [코리안투데이] 경로당에서 가족 암호를 정하는 어르신들 © 장형임 칼럼니스트

몇 해 전만 해도 보이스피싱은 어눌한 말투나 낯선 번호로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짧은 목소리 조각만 있어도 그 사람처럼 말하게 만드는 기술이 흔해졌습니다. 저는 인공지능을 날마다 곁에 두고 쓰는 사람이라 이 변화가 얼마나 빠른지 가까이서 봅니다. 편리함이 커진 만큼 그 편리함을 나쁘게 쓰는 손도 함께 늘었습니다. 바다 건너 섬에 산다고 해서 그 손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걱정이 저 혼자만의 것은 아닙니다.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KAIT)는 2026년 8월 10일, 가족 목소리까지 흉내 내는 AI 보이스피싱 등 노년층 피해를 막기 위해 AI 서비스 피해예방 전문강사단 심화교육을 실시한다고 밝혔습니다. 협회는 올해 교육 대상이 3만 5천 명이며, 보이스피싱 피해예방 포스터와 리플릿 15만 부를 제작해 전국 경로당과 노인종합복지관 등에 배포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읽으며 반가우면서도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포스터가 경로당 벽에 붙는 날까지, 그리고 붙은 뒤에도, 누군가는 그 내용을 어르신 손에 다정하게 쥐여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날 제가 꺼낸 방법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가족끼리만 아는 ‘우리 집 암호’를 하나 정해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급하게 돈 이야기가 나오면 전화를 건 쪽에 그 암호부터 물어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계가 목소리는 흉내 낼 수 있어도, 식구들이 함께 쌓아 온 기억까지 흉내 내기는 어렵습니다. 어르신들은 처음에는 쑥스러워하시다가 이내 하나둘 웃으며 머리를 맞대셨습니다.

암호는 집집마다 달랐습니다. 이장님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즐겨 부르시던 노래 제목을 고르셨습니다. 한 할아버지는 아들이 어릴 적 키우던 누렁이 이름을 대셨고, 옆자리 할머니는 “우리 집은 첫 손주 태어난 날 내린 눈이야” 하시며 한참을 웃으셨습니다. 저는 그 암호들을 받아 적으며 이것이 결국 한 집안의 역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이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가장 든든한 자물쇠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물론 암호 하나로 모든 걱정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저는 어르신들께 전화를 일단 끊고 자녀의 원래 번호로 다시 걸어 보시라는 말씀도 함께 드렸습니다. 돈을 보내 달라는 말이 나오면 서두르지 말고 이웃이나 이장님께 먼저 물어보시라고도 했습니다. 섬마을은 서로의 대문을 오래 알아 온 곳이라, 한 번 더 묻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기술이 빨라질수록 천천히 확인하는 습관이 사람을 지켜 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저도 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 집 암호를 정하자고 했더니 딸은 처음엔 웃다가 곧 진지하게 한 단어를 골라 주었습니다. 그 단어는 여기에 적지 않겠습니다. 다만 통화를 마치고 나서야, 어르신들께 드린 이야기를 정작 저희 집에서는 미뤄 두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러분의 집에는 가족만 아는 암호가 있으신가요, 그리고 오늘 저녁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낼 사람은 누구일까요.

인공지능은 목소리를 빌려 갈 수는 있어도 한 가족이 함께 지나온 시간까지 빌려 가지는 못합니다. 경로당을 나설 때 처음 질문을 던지셨던 할머니가 제 손을 잡고 “이제 딸이 전화하면 암호부터 물어볼 거예요” 하셨습니다. 섬의 가을은 짧지만 그날 마루에서 정한 암호들은 오래 남을 것입니다. 저는 다음 달에도 그 마루에 다시 앉아, 어르신들이 암호를 잘 간직하고 계신지 여쭤볼 생각입니다.

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기록은 제가 강화에서 쓰고 만든 책과 서비스에도 담겨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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