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한 하루가 쌓이면돌봄은 몸이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말이 쌓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모님께 화를 낸 것 같아 미안하고, 그러면서도 지친 마음을 어디에 털어놓아야 할지 몰라 삼키게 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삼킨 말은 사라지지 않고 어깨와 표정, 말투에 조용히 배어드는 것 같습니다.
흔한 장면이 있습니다. 저녁상을 치우며 같은 질문에 세 번째 답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곧바로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입니다. 그 뒤로 설거지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지지요. 그런 날은 '내가 왜 이럴까'라고 자신을 탓하기보다, 마음을 쏟을 곳이 없어서 넘친 것이라고 이해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먼저 권하고 싶은 것은 '말할 자리'를 일부러 만들어 두는 일입니다. 거창한 상담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오늘 힘들었던 일 한 가지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한두 문장으로 건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느낌사람은 누군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준다고 느낄 때 긴장이 조금씩 풀리곤 합니다. 해결책을 얻지 못해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에 작은 여유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대화와 정서적 지지가 돌봄의 부담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일상에서 이미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돌봄을 하다 보면 오가는 말이 대부분 '약 드셨어요?', '식사하셨어요?' 같은 확인에 머뭅니다. 필요한 말이지만, 이런 말만 오가면 서로 마음을 나눌 틈이 좁아집니다. 부모님도 돌봄을 받는 처지가 미안해 속내를 말하지 못하고, 돌보는 쪽도 피곤하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각자 조용해지는 일이 많습니다.
이럴 때는 확인의 말 사이에 마음의 말을 한 줄 끼워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나도 좀 피곤하네요, 같이 차 한 잔 해요' 같은 말입니다. 약 챙기는 말보다 어렵지만, 이렇게 한 번 열린 문은 다음 대화를 훨씬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조언 대신 맞장구를 먼저가족 사이의 대화는 가까운 만큼 서툴러지기 쉽습니다. 걱정되는 마음에 '그러니까 진작 병원 가시라고 했잖아요' 하고 앞서 말하면, 상대는 걱정보다 꾸중으로 듣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돌보는 나도 '힘들겠다'는 말 대신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더 닫히곤 합니다.
그래서 대화의 첫마디는 조언보다 맞장구가 좋습니다. 부모님이 같은 옛이야기를 또 꺼내실 때 '그 얘기 전에 했잖아요' 대신 '그때 참 힘드셨겠어요' 하고 받아 보세요. 이야기를 함께 떠올리는 시간은 부모님께도 기억을 편안하게 꺼내 보는 시간이 되고, 내게도 숨을 돌리는 시간이 됩니다.
나 자신에게도 같은 방식이 필요합니다. 스스로에게 '더 잘해야지'라고 채근하던 말을 '오늘도 애썼다'로 바꿔 보는 것입니다. 쑥스럽더라도 소리 내어 말해 보면, 마음의 속도가 조금 늦춰지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찻잔 두 개를 놓는 작은 의식저는 아로마테라피스트로 일하며 부모님을 돌보았던 시간을 지나왔는데, 그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특별한 기술보다 하루 한 번의 '앉는 시간'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각에 찻잔 두 개를 놓고 따뜻한 물을 붓는 단순한 일이, 돌봄의 모드에서 잠시 벗어나 '함께 앉은 사람'으로 돌아오게 해 주었습니다. 김이 오르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면 몸도 마음도 조금 느슨해지는 듯했습니다.
창밖이 흐려도 좋습니다. 오히려 흐린 날이 차분한 대화에는 어울리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는 할 일 이야기는 잠시 내려놓고, '오늘 하늘이 낮네요', '어릴 적 이런 날엔 뭘 하셨어요?' 같은 가벼운 말로 시작해 보세요. 대화가 길지 않아도, 매일 같은 자리에서 이어지면 그 자체가 서로에게 안정감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계시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마주 놓은 두 번째 잔을 친구나 형제, 혹은 전화 너머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놓아 보셔도 좋습니다. 통화를 하면서 같은 시각에 각자 차를 마시는 것도 작은 연결이 됩니다.
혼자서 다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대화가 도움이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을 가족 안에서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고, 그럴 땐 비슷한 처지의 이웃이나 돌봄 모임, 지역의 상담 창구처럼 바깥의 이야기 상대가 숨통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약해서가 아니라 오래 돌보기 위한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내가 쉬는 시간'을 가족에게 먼저 말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이라도 다른 가족이 대신 곁을 지키게 하고 그 시간은 온전히 내 것으로 쓰는 식입니다. 처음에는 미안하고 어색하지만, 이렇게 마련한 여유가 결국 돌봄을 더 오래, 더 부드럽게 이어 가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오래 가라앉거나 잠을 이루기 어려운 날이 이어진다면, 혼자 견디지 말고 가까운 보건소나 전문 상담 창구에 이야기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것 역시 나를 돌보는 일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의 마음돌봄 실천
★☆☆오늘 바로: 따뜻한 물이나 차를 두 잔 준비해 의자에 편히 앉으세요.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 숨을 천천히 세 번 내쉰 뒤, 앞에 앉은 분께(혼자라면 마음속으로) '오늘 하루 어떠셨어요?' 하고 한 번만 물어보세요. 따뜻한 잔의 온기와 느린 호흡이 몸의 긴장을 풀고 말문을 열어 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한 걸음 더: 하루 중 시간을 정해 5~10분 '마음의 말 한 줄' 나누기를 해 보세요. 먼저 '오늘 좋았던 일 하나'를 말하고, 다음으로 '조금 힘들었던 일 하나'를 말합니다. 상대가 말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듣고, 첫마디는 '그랬군요'로 시작하세요. 정해진 순서가 있으면 어색함이 줄어 이야기를 꺼내기 쉬워집니다.
★★★여유가 될 때: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나만의 쉼 시간'을 달력에 적고 가족에게 알려 두세요. 그 시간에는 좋아하는 향의 핸드크림을 손에 천천히 바르거나 창밖을 바라보며 차를 마셔도 좋습니다. 손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동안 향으로 기분을 다독이고, 나를 돌보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여유를 남겨 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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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희 기자: incheonsouth@thekoreantoda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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